정신이 아직 혼미한지 몸을 가누지 못하던 피네가 간신히 눈앞의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는 몇 분이 더 걸렸다. 다행히도 기억 상실이라거나, 그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알터, 알터 맞지? 지금은…… 언제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앳된 기운이 남아있던 소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른스러운 얼굴을 지닌 알터를 보며, 피네는 그렇게 물었다. 알터는 기쁘면서도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수 년 지났답니다, 피네 님."
"……그렇구나."
성자, 아니 깨어난 기사 피네는 차분히 기억을 되짚었다.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 같은데 몇 년이나 지났다니, 예상했던 일이기는 해도 막상 닥치자 현실감이 없었다.
막지 못한 채 다가왔던 멸망의 날, 이계의 신이 건넨 파멸을 피하기 도망친 땅이었다. 이곳을 멸망과 분리하기 위해서는 봉인이 필요했고, 그 봉인을 위해 알반 기사단 조장들은 마지막 남은 힘까지 전부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관에 안치되어 잠들어 성자로 추앙받기까지 하고 있던 자들은 바로 알반 기사단의 조장들이었다. 네 군데의 관과 네 군데의 봉인, 그 중 하나가 지금 알터의 눈앞에서 풀렸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피네 님, 어디 안 좋으신가요?"
피네가 말이 없자 알터가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피네는 이상한 점을 깨닫는 중이었다.
"아니, 몸은 괜찮아졌어. 그냥, 기억이 좀 안 나서."
"어떤 게요?"
"그러니까……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잠들어야 했는지, 그런 건 다 기억이 나는데 정작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없어서 약간 텅 빈 기분이야."
"조금 있으면 기억나시지 않을까요? 아무튼 피네 님을 뵐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하긴 그랬지, 이 방법을 누군가 고안해냈을 때 조장들은 큰 이견이 없었다. 아르후안의 조장 아벨린은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했고, 엘베드의 조장 톨비쉬는 설마 깨어나지 못하겠냐며 평소와 다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레르의 조장 피네는 그게 가야할 길이라면, 하고 중얼거렸고 엘베드의 조장 카즈윈은 말이 없었다. 다들 자기다운 방식의 긍정이었다. 각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심중에만 있을지언정, 모든 뜻은 신의 아래에 있었다.
과거 불순한 힘에 오염된 적이 있는 피네의 불안 요소에 대해서 피네 스스로 말을 꺼내기는 하였으나, 그 점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기로 하였었다. 아무 문제 없이 수 년으로 그쳤으니 다행이지, 정말로 수십 년 혹은 백 년 이상 잠들어서 알터도 없는 미래에 깨어났으면 지금쯤 황당하지 않았을까 하고 피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발론 게이트에서 대기하게 된 조장 부재의 엘베드 조, 피네의 에일레르 조, 카즈윈의 헤루인 조는 긴장감을 지우지 못한 채 게이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몇 분이 될지 몇 시간이 될지, 어쩌면 며칠이 될지 모르는 대기 가운데 기사단원들은 견습을 포함하여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꼭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기다리란 법은 없었다. 잠시 조원들을 둔 채 피네는 슬쩍 근처의 카즈윈에게 말을 걸었다.
"또 보네, 카즈윈."
"……."
"사건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카즈윈이랑 보는 건 왠지 다행이란 느낌이야."
"……다행?"
"응, 뭐든지 해결해줄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아차, 이러면 안 되지, 같이 해결해야 하는걸."
피네 나름대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대화라는 것쯤은 카즈윈은 물론 알고 있었다. 카즈윈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다른 조원들은 피네가 카즈윈에 대해 보이는 태도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헤루인 조원들은 어쩐지 이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새삼스런 이야기일까? 매일 같이 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그랬지……."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는 카즈윈을 내버려두고 피네는 그러고 보니, 하고 이전에 있던 일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볼 수 있는 생각, 그것만큼은 피네 혼자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고 결국 고심 끝에 의사를 찾아간 피네는 확실한 진단을 받았다. 초기여서 오진의 가능성은 있지만, 그래도 거의 확실하다고 했지. 피네도 아마 그게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퇴를 고려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알반 기사단 전투조의 조장으로 활동하는 것은 멀쩡한 기사에게도 신체적 부담이 컸다. 하물며 피네처럼 스스로의 결함을 느끼고 있던 사람에게는, 오래 활동하기가 어려운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굴레에서 많이 벗어났다고는 해도, 과거의 후유증은 어쩔 수 없는 방식으로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래서, 은퇴하게 된다면 아마 그런 이유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난 뒤 가장 기쁘고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이 아버지에겐 말했으니 상부에도 보고하고 인수인계할 준비라도 해야할까, 피네는 카즈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알반 기사단 내부에서 결혼하는 경우는 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전투조 조장이 현역에서 혼인 후 이렇게 은퇴하는 것은 별로 없는 일이었다. 피네는 어차피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음을 밝히면서, 이번을 계기 삼아 전투조에서 물러난 뒤 추후 다른 보직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