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의 의미를 담고 축하하고 싶어서 쓴 이야기
한번쯤은, 삶에서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는 물음을 지니고 싶어진다. 그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생각의 끝에서 지웠던 의문을 떠올려보고는 다시 지우곤 했다.
지금은 의미가 없다, 다만 먼 예전에는 가장 통렬하게 아프고 괴로웠던 질문을 심장을 쥐어터뜨리는 듯한 고통 속에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피네, 오늘도 좋은 하루!"
"응, 너도."
동료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 피네가 복도를 걸어 거울 앞에 섰다. 만나는 이들마다 살갑게 인사해주고 축복을 기원한다. 신에게 귀의한 자들다운 집단의 밝은 기운 속에서 피네는 때론 위안을, 때로는 회한을 받았다. 이렇게나 아름답고 맑은 사람들이 존재하니 그토록 이 세상에 살아남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반면에 그런 사람들의 끝자락을 구차하게 붙잡고 살아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곤 했다.
비관적인 생각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모든 것을 아는 분께서 굽어살피신다. 그릇된 선택도 올바르게 나아가려는 노력도. 그녀에게 닥쳤던 비극은 이 땅이 그분의 섭리로 아직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면 ,그 누구도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이 몸을 던지겠다고 맹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하나를 숨기면 자연스럽게 움츠러드는 모양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는 그녀에 대해 눈치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건 그런 사람치고는 그녀가 많은 사람들을 돌봐주고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대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그 전부가 같은 거리에서 그녀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기사 피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오직 신뿐이시지 않은가, 거짓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으나 솔직한 모습은 오직 신의 앞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제와도 그저께와도 변함이 없다. 단정하고 활동하게 편하게 묶어올린 하얀 머리카락, 고운 색을 띤 연둣빛 눈동자, 미소를 쉽게 잃지 않는 입술, 의복은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린 피네가 역시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는 날이라고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특별한 건 없어."
설령 특별한 날이라고 해도 일상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신의 기사였다. 조심스럽게 완드를 쥐고 마나의 흐름을 살핀 피네는 오늘의 일정을 점검했다. 멀리 나갈 일은 없고, 정기적인 훈련과 무기 조정, 무언가 도와달라는 요청도 하나 있었던 것 같고…….
바깥으로 나가자 청량한 아침 공기가 뺨을 차게 식혔다.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해 훈련장으로 향할까 하니, 부지런한 기사 하나쯤은 이미 나와있는 것 같았다.
그 부지런한 기사가 설마 그라고는 피네도 생각지 않았지만.
"어라, 카즈윈."
견습 시절부터 자주 보아 익숙한 얼굴이 가벼운 옷 하나만 걸친 채 훈련장에서 검 두 자루를 들고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아무리 내부 훈련이어도 정식 기사라면 최소한의 장비를 갖추는 편이었지만 카즈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무기만을 들곤 했다. 그러다가 다쳐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관리자에게 잔소리를 들어도 카즈윈이 실제로 훈련 중 다친 적이 없으니 다들 포기한 것 같았다.
"일찍 일어났네?"
그가 그렇게 늦게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훈련을 하러 오지는 않았다. 언제 훈련을 하는지도 모르게 좋은 성적을 내고 있던 카즈윈은 가끔 견습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훈련을 하고 있던 것인지 그냥 서있던 것인지 모를 카즈윈은 얼굴을 들어 피네를 보았다. 피네는 말이 없는 카즈윈의 표정을 읽어보았다. 어쩐지 오늘은 전보다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음……."
"……."
"훈련은 아닌 것 같고, 혹시 날 기다렸어?"
"맞아."
카즈윈은 쓸데없는 말을 하느니 입을 다무는 편이었다. 카즈윈이 그녀를 기다렸다니 별 일도 다 있다. 볼 일이 있다면 이런 시간에 무작정 훈련장에서 기다리기 보다는 찾아오는 게 빠르기 때문이었다. 피네가 아침에 훈련장에 자주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카즈윈이 날 기다릴 정도면 중요한 일이야?"
"어."
"와, 그거 엄청난 일인가봐. 조장님께 비밀 임무라도 받은 거야?"
피네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물었다. 사람들의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시간의 둘만 있는 장소,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피네는 어쩌면 오늘은 아무 변화도 없는, 반복되던 날이 아니라 조금 특별한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인지 불문하고 카즈윈이 아침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좋은 날이 되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피네는 어쩌면 카즈윈의 통찰력을 우습게 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이쪽을 보고 있던 카즈윈이 내민 물건의 정체를 깨달을 때까지 그녀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디에 감추어놓았던 것일까, 하얀 꽃잎이 팔랑 떨어져 피네의 발등 위로 떨어졌다. 꽃잎 틈새의 잎사귀 같은 눈을 피네가 거울 앞에서처럼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무언가 잘못 보았나 싶어서.
카즈윈의 어둡게 탄 손에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흰 꽃으로 엮인 화관이 있었다.
"……어머?"
"……."
"저, 카즈윈. 나 주는 거야?"
"그래, 선물이야."
대답하면서 카즈윈이 그녀의 시선을 살짝 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카즈윈이, 자기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했나. 피네는 선물도 카즈윈의 행동도 믿기 힘들었지만 두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피네의 머리에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하얗고 작은 꽃들이 촘촘히 엮인 사이로 장식으로 들어간 노랗고 푸른 풀꽃이 아름다웠다. 찬찬히 선물을 살핀 피네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고마워, 이거 주려고 기다린 거야?"
그 때까지만 해도 피네는 그 카즈윈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서, 설마 카즈윈이 짐작하고 행동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카즈윈의 입이 열리고 그 말이 떨어졌을 때, 피네는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생일 축하해, 피네."
"아……."
그녀의 입술이 놀라움으로 벌어져 다물리지 않았다. 두 손에 받쳐든 화관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피네의 동태는 알아차렸을 터였다.
"어, 저기, 그."
머뭇거리던 피네는 멋쩍은 얼굴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정확하게 축하를 받았는데 시치미를 뗄 수는 없지 않은가. 피네는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녔지만, 어쩐지 카즈윈이 말하니 숨겼던 사실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식었던 뺨이 조금 달아오르지 않았나 싶었다.
카즈윈은 그답게 대답했다.
"그냥, 보다가…… 알았어."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어도 언제나 주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카즈윈이다. 알고 지낸지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니, 아마 매 년 이 맘 때쯤에 피네의 낌새를 보고 추론한 것이 아닐까. 아니었더라면 양쪽 다 민망했겠지만, 피네는 이런 사실에 있어서 카즈윈이 결코 틀렸던 적이 없다고 잘 알았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지 못한 피네가 둔해졌던 머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이 날 아침이면 지웠던 의문이 심장을 움켜쥐는 순간이 온다.
태어났음을 축하하는 날.
그리고 어쩌면 탄생은 누군가에겐 저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되새기는 날.
'두 분은 제가 있어서 행복하셨나요?'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이 부모가 맺어낸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이였다. 아이가 아무리 손이 많이 가고 병치레를 해도 포기하는 일 없이 아이를 사랑해주었다.
사랑받았었기 때문에 괴롭다. 그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분들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딸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분들은 딸이 있다는 행복은 누리지 못했어도, 불행의 씨앗을 품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녀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분들은 그렇게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빠와 엄마를 죽이지 않았을 텐데.
그 때, 아니 더 이전에…… 더라면, 좋았을 텐데…….
"피네."
"어, 응?"
밀려드는 상념에서 퍼뜩 깨어난 피네가 화들짝 놀랐다. 카즈윈이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피네가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느끼는 시선이었다. 조금 전에 시선을 돌렸던 것은 축하의 말이 카즈윈이라도 쑥쓰러웠던 탓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된 피네에게 카즈윈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네가 태어나서…… 다행이야."
상투적인 축하인사의 하나였다. 카즈윈은 이런 데에는 그리 말재주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이것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축하였다. 짧은 말과 작은 선물, 진심을 담은 눈빛.
카즈윈은 그 때만 해도 몰랐다. 피네가 지닌 진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먼 이후, 피네와 카즈윈이 서로 다른 전투조의 조장이 되고 험난한 시련을 넘어 다시 만나게 된 다음의 일이었다.
피네는 손가락으로 눈에 고인 물을 훔쳤다. 카즈윈은 그녀가 왜 생일을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는지 섣불리 짐작하지는 않았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방울이 꽃잎에 살짝 떨어졌다. 목이 살짝 메인 채 피네가 말했다.
"카즈윈은 그런 인사 잘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는구나."
"……잘 안 해."
"그럼 나한테만 해준 거야?"
"아마도."
카즈윈이라는 남자가 아마도라고 하면 그건 확실하다는 뜻일 터다. 피네는 놀랐던 표정을 완전히 지우고 웃었다. 카즈윈이 보기에는 이제 화관보다 조금 더 아름다운 미소였다.
"고마워."
이제야 말할 수 있다. 고마워, 당신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환청이 들리지 않은지는 조금 되었다. 들리지 않으니 잊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특별한 날에는 생각이 나고 만다. 그래서 특별한 날을 특별하지 않게 만들면, 아픈 기억이 덜 나지 않을까 하곤 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있었던 일을 없애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딛고 나아가는 것밖에 모르는 삶을 택하여 계속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 질 수는 없었다. 피네는 흰 화관을 머리 위에 얹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든 꽃이 피었다.
"어울려?"
"……."
대답이 없다. 그래도 피네는 즐거웠다.
특별한 일이 있다. 특별한 사람이 앞에 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로 특별한 날이 다시 되고 말았다.
태어났던 날, 태어난 것을 원망하곤 했던 날, 그리고……
소중한 당신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해준 날로.
삶에서 탄생은 생의 축복과 고통의 저주 안에서 계속 돌고 돌겠지만, 단 한 사람이 긍정해준 것만으로도 그녀의 안에서 그렇게 미소가 피었다.
탄생의 화관을 쓴 채 그녀는 가족을 잃어버린 이래 가장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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