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추워서 썼습니다......
카즈윈 참 대단한 남자예요
천을 몇 겹 덧대어 마감된 건틀릿 안쪽으로 바람이 들어올 정도로 추웠다. 울라 대륙 최북단이나 피시스의 설원에서나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추위였다. 이미 얼어버린 손끝에는 입김도 닿지 않을 터라 포기한 채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피네는 방패의 손잡이를 쥐었다.
피네가 자랐던 곳은 그렇게 추위가 찾아올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울라 대륙에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보통은 기후가 괜찮은 편이라, 겨울이 오더라도 외투 한 벌 정도면 무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정도 추위라면 가축이 얼어죽거나, 노인과 아이들이 힘들어할 만했다. 아튼 시미니시여, 약자들을 굽어살펴주시옵고. 피네는 일상적인 기도를 읊었다.
건틀릿의 연결부를 조금 굽혔을 뿐인데도 피부가 쓰렸다. 작은 모닥불로는 이 쓰라림을 녹일 수 없다. 아브 네아의 언덕, 음유시인 캠프까지는 아직 조금 더 걸어야했다.
혼자여서 더 춥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와 같이 있어도 혼자인 것처럼 굴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었다. 캠프 파이어 앞에 동료들과 함께 앉아있어도 자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곤 했었다. 반짝거리는 눈을 가진 견습 기사들 사이에서, 피네는 온기를 받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견습 시절부터 자신에게는 그 정도가 합당하다는 것처럼 굴었으니, 더 큰일이 생겨버린 이제는 아무도 다가와주지 않아도 별 수 없는 일이다. 정식 기사들은 조원급까지도 모두 피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을 터였다.
판단을 보류하는 것처럼 보였던 아벨린과는 그 뒤 만난 적이 없으니 이제 다시 만나면 어떨지 모른다. 아벨린이 가진 이름처럼 싸늘한 태도가 돌아오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은 죄는 소멸하지 않으며 참회하는 것만이 가능하므로, 피네가 속죄를 게을리한다면 아벨린 같은 이가 서릿발 같은 불호령을 내려주는 쪽이 마음이 더 편했다. 발이 넓은 톨비쉬와는 한 번 더 보았지만 그는 피네를 대하는 태도가 그다지 변하지 않아서 무섭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 사실을 들은 에일레르의 조원들처럼 긴장하고 경계한다면 무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었다.
그쪽이 보통이지 않은가, 피네는 부탁을 했다.
"다행히도 지금의 저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판명되었고 문 안의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는 다급한 상황이라 조장으로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제가 하는 당부일 뿐만 아니라 상부의 지시이기도 해요, 만약 저에게 무슨 문제가 생겨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면, 제 생명을 우선시할 필요는 없다고 못박아두겠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겠지만, 기사로서 목숨을 걸었던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다. 각오는 언제나 되어있었다. 아튼 시미니의 이름을 더럽히느니 화산으로 뛰어들겠다고 결심할 수 있을 정도의 신앙이 가슴에 존재했다. 피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모든 것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이 세상에 있을 뿐이었다.
추위 속에서도 빛은 올곧았다. 왜곡된 환상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평원 위에, 신기루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피네는 혼자만의 시간이 끝난 것처럼 불안해하고 안도했다.
그가 눈에 보이면 혼자인 듯이 혼자가 아니었다.
"춥지 않아 카즈윈?"
왜 여기에 있냐고는 말하지 않는다. 매번 그를 찾으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보았을 때에는 몇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런 곳을 좋아하느냐고, 대답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대답이 있었어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곳이 그가 있어야할 가장 적당한 자리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그녀는 느꼈다.
"조금은."
"그러게 잘 챙겨입으라니까."
"……."
피네의 손이 곱아들 정도로 추운 날 속에서도 외투조차 걸치지 않은 남자는 평소에 드러내던 맨 피부 위에 가볍게 망토 한 장을 걸치는 정도로 추위를 덜어내고 있었다. 전혀 춥지 않은 것처럼, 그는 앞장 서서 걸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건 모르지만 피네는 그가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것은 알고 왔으리라고 추측했다. 조원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뒤 피네는 믿고 따르던 조장님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들이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거리를 두어도 괜찮을 거라고 제안한 쪽도 피네였다. 조원들에 대한 배려일지, 아니면 잠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기심인지는 모르겠었다.
"기르가쉬 정도 되는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3인 1조로 행동할 필요는 없겠지요. 마침 임무가 둘 있으니 나누어서 수행하는 방침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에는…… 그저 주신의 검으로서."
조원들은 고민하면서도 납득해주었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싹을 지니고 있으니 그렇게 된다면 언제든지 소멸시켜달라는 말을 듣고도 가슴에 아무 변화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신앙이 공고한 기사라도 거의 없을 터였다. 그 흔들림을 잠재울 시간이 필요하기에 인간으로서 사고해야 할뿐.
반드시 문제가 생길 거라고 판단했다면 조장의 자리도 기사의 명예도 벗어던졌겠지, 피네는 그렇게 비관적이지는 않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아브 네아를 둘러싼 추위만큼이나, 비정한 칼날처럼 목 앞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입이 추위에 붙어버렸는지 그에게 건넬 시덥지 않은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건 다 날씨 탓이야, 손도 발도 머리도 꽝꽝 차가워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버리면, 그 날의 화산과 다를 게 무엇이 있는가.
"피네."
피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등 뒤에 음유시인 캠프가 보이니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조원들은 어쩌고 왔느냐고 묻지 않아도 그라면 무책임하게 여기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 여기에 나타난 그가 정말로 신기루가 아닌지 하는 생각은 이제 슬슬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카즈윈은 곁에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질 때에도,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줄곧.
그의 입김이 하얗게 공중으로 흩어지면서, 짧은 말을 만들었다.
"얼어붙지 마."
너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온 걸까?
불어오는 바람을 밀어내는 것처럼 카즈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었고 피네는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도무지 녹지를 않는걸."
그렇게 말하며 피네는 손끝에서 신성력을 피워올렸다. 음유시인 캠프 근처에 사도의 기운을 방지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모험가인 것처럼 캠프로 숨어들어 정보를 수집한 뒤 빠져나오면 되는 임무였다.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홀히해서는 안 된다. 카즈윈이 도와주지 않아도 피네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카즈윈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으……."
아예 손에 감각이 없다. 임무의 첫 번째 조건을 마친 피네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려고 하자 무언가가 둔탁하게 장갑 위를 끌어당겼다. 통각이 거의 사라졌으니 처음에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몰랐다. 건틀릿의 끝을 잡고 잡아당기자 차갑게 굳어버린 금속조각이 삐그덕거리며 피부와 멀어졌고 천이 덧대어진 손가락이 드러났다. 위험할 정도로 새빨갛게 보였다.
"언제 이렇게 됐지……?"
"캠프."
자신이 벗겨낸 건틀릿 한쪽을 든 채 카즈윈은 음유시인들의 캠프로 다가갔다. 장작을 얻고 불을 피울 자리를 얻었나 보았다. 피네는 그의 곁에 앉아 나머지 장갑도 벗고 불가에 손을 대었다. 온기가 돌아오니 오히려 통증을 느낄 정도로 얼어있었던 모양이었다. 피네가 다시 얼굴을 찡그리자 조금 뜨뜻한 것이 피네의 손등을 감쌌다.
"카즈윈."
"……."
그야 이 날씨에 카즈윈이라고 몸이 따뜻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던 그녀보다는 나은지, 피네는 그 손이 무척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친절한 음유시인이 나무 장작을 더 주었고 불기운이 몸 주위를 서서히 감쌌다.
"아, 살 것 같아……."
피네가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하자 카즈윈은 올려놓았던 손을 다시 가져갔다. 간신히 그의 손과 온도가 비슷해진 손을 자신의 양 뺨에 대며 피네는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엍어붙지 말라니, 아브 네아의 언덕을 걸으며 스스로를 추위 속에 가두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던 걸까.
"카즈윈, 나 추워."
그가 이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얼굴도 손도 이제 빨갛지 않은 그녀는 별로 객관적인 의미로 추워보이지 않았다. 카즈윈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게속 추웠나봐, 내가 모르던 때부터 쭉. 그러니까 이렇게 바람이 불면 동상에 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금세 얼어버리나봐. 계속 설원위를 걷던 것처럼."
추운 곳에서 정신을 잃고 잠들면 죽어버린다는 경각심처럼 언제나 깨어있는 채 살아왔다면 마음이 그대로 얼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피네는 신을 섬기는 기사였고 몸은 마음을 따라야 했다.
마음이 계속 얼어있었는데 무엇이 바뀌겠는가, 피네는 모든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결국 카즈윈과 그 밀레시안을 제외하고는 깊은 속내를 말하지는 못했다. 조원들에게도 결국 필요한 점을 나열하고, 납득 받고, 그렇게만.
"그랬는데 신기하게 카즈윈이 서있지 뭐야. 물론 카즈윈이 있다고 바로 따뜻해지지는 않았어. 그냥, 갑자기 나타난 환영처럼 여기에 있으면서 한 마디를 해줬어."
"……."
"솔직히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말이라구.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피네는 얼굴이 뜨거웠지만 눈물이 고이게 하지는 않았다.
"……내가 얼어붙지 않을 때까지 곁에 있어줘."
"그럴게."
대답은 매서운 바람만큼 빨랐고 피네는 아까처럼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변함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아직 약간 남은 추위에 찌든 채 웃었다. 카즈윈이 갑자기 시선을 피하며 눈가를 어색하게 움직였다. 피네는 카즈윈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붙잡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던 당신의 모습은 마치 다가가도 다가가도 멀어지는 신기루처럼 지켜보는 것만으로 존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 한 마디도 얼음으로 만들어진 벽마저도 녹일 만큼, 상상도 환상도 아니게 되었기에 곁에 있어달라 하고.
다시 한 번 설원을 횡단하는 듯한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다고 해도 이제는 이전과 많이 다르겠지. 적어도 그토록 얼어붙지는 않으리라고 피네는 캠프 파이어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손등에 남은 온기로 착각하며 생각했다.
아브 네아에서 갑작스러운 추위가 물러가는 데에는 며칠이나 더 걸렸고 이 기상 이변이 어째서 일어난 것인지 조사가 필요했다. 마침 그 당시 거기에 있었던 피네는 추후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문장을 빼느라 애를 먹었다.
울라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혹독한 추위이기는 했지만 얼어붙지 않을 수는 있었다고,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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