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조님께서 주신 토막글 리퀘스트입니다
짝사랑하는 로간이 혼자 삽질하는 방향의 얘기
로간은 기분이 좋았다. 조장과 함께 다니는 외출은 언제나 각별했지만 그중에서도 무도회는 한껏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유독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기고 소매의 접힌 부분이 에법에 맞는지 확인한 뒤, 문앞에서 기다린다. 아발론 게이트에서 출발하는 로간과 달리 그의 조장은 일이 있어 다른 곳에 들렀다 온다고 하였던가, 마차의 문이 열리고 왕성의 입구에서 작은 구두가 사뿐히 길 위를 밟았다. 긴 드레스 자락이 곧 발등을 덮었다. 평소엔 활동하기 편하게 머리를 고정하는 조장이 그 긴 갈색 머리카락을 한껏 화려하게 펼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은색 브로치를 꽂아 옆머리를 고정한 채였다. 목부터 손목, 발끝까지 빈틈없이 기품 있는 곡선으로 몸을 덮은 드레스는 누군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로간은 숙녀에 대한 예의로서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죠, 조장님."
"고마워요 로간."
로간보다 머리 두 개쯤 작아보이는 소녀는 귀여운 눈동자로 부드럽게 웃으며 로간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선이 잠시 쏟아지고는 곧 사라졌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홀 가운데에서 의레적인 인사를 마치고 한바퀴 빙글 돈다. 체격도 키도 한참 차이가 나니 춤을 추는 상대에게 맞춰주는 로간에게 힘들지 않느냐는 시선을 조장이 보내곤 했지만 즐거운 로간에게는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조장은 의레적인 인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로간은 지극히 진심이었다. 평소의 조장님이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은 물론 해본 적도 없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소녀는 그 자그마한 몸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생기를 주변에 나누어주는 존재였다. 로간에게는 그런 조장을 평소에 보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지만, 이렇게 정성 들여 꾸민 채 자신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조장님이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었다.
로간은 푸른 색 바탕 위로 희고 검은 배색이 아름답게 드리워진 드레스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밀레시안인 조장은 평소에 꽤 노출이 심한 옷도 아무렇지 않게 입었지만, 오늘의 드레스는 몸을 하나도 드러내지 않고도 팔은 좁고 치맛자락은 풍성하게 하여 상체의 매력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우아함을 강조하는 형태였다.
"오늘 드레스는 정말 조장님을 위해 맞춘 것 같은 걸요."
로간은 어느 디자이너의 옷인지까지 알아볼 재주는 없었지만, 주변에서 소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엘리네드 의상실쪽에서 나온 옷인 모양이었다. 로간의 칭찬에 조금 수줍어하며 조장이 대답했다.
"로간은 언제나 날 많이 띄워준다니까요."
"저는 언제나 진심인걸요. 그 드레스는 직접 고르신 건가요?"
"선물 받은 거예요."
누구인지 몰라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다. 로간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물었다.
"선물을 주신 분의 안목이 좋으시군요. 조장님께 어울리는 옷을 언젠가는 저도 꼭 선물해드리고 싶네요."
로간의 조장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로간이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답을 들려주었다.
"나도 마음에 드는 옷이에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준 거니까요."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로간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정말…… 좋아하는 분이요?"
"네."
그 말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조장은 태연하기만 했다. 로간은 말을 고르며 머뭇거렸다. 할 수 있는 말의 선택지가 전부 사라진 느낌이었다.
"어…… 떤 분이시죠?"
"다정하고 상냥하고 나를 가족처럼 잘 대해주는 아주 멋진 사람이에요."
진짜로 무너진 기분이었다. 맥없는 웃음을 흘리며 로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조장의 얼굴이 정말 행복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품어버린 크나큰 오해를 풀 틈 없이 무도회는 끝이 났고, 로간은 '다정하고 상냥하고 잘 대해주는 멋진 사람'이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빙빙 돌리며 그 날 밤 잠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로간의 오해가 풀린 것은 며칠 뒤 훈련을 마친 카나가 무도회 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른 덕분이었다. 패션에도 꽤 관심이 많은 카나가 조장님이 입었던 드레스가 궁금하다고 하자 조장이 아직 가지고 있다며 옷가방에서 고운 드레스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아픈 기억이 떠오른 로간이 멀리서 괜히 뜨끔하는 사이 카나는 순수하게 드레스를 보고 감탄했다.
"엘리네드제 드레스는 이렇게 예쁘구나……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이멘 마하의 엘레노아씨가 디자인하는 옷도 굉장히 아름다웠어요."
"나도 엘리네드의 옷은 이게 처음이었어요. 이런 드레스는 자주 입지는 않으니까, 사려고 한 적이 없었거든요."
"선물 받으셨다고 했죠? 좋겠다, 저도 이런 선물을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되게 기쁠 거예요."
로간은 목이 답답했다. 듣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재잘거리는 소녀들의 목소리는 유독 잘 들리기 마련이었다.
"사실 어울리지 않거나, 쓸 수 없는 선물이었어도 좋아했을 거예요. 소중한 사람한테 받은 물건이란 그런 거라고, 최근에야 알았거든요."
"저도 언니한테 받은 거라면 확실히 그래요."
로간이 삼켰던 오해가 반복되기 전에 조장이 그 순간 말을 꺼낸 게 정말 다행이었다.
"소중한 친구가 준 옷이니까, 앞으로도 잘 간직하려고요."
소중한…… 친구? 로간이 눈만 끔뻑거렸다. 카나가 신이 나서 말했다.
"다음에는 저랑도 무도회에 가주세요 조장님! 이 옷 입으신 거 꼭 보고 싶어요."
"그래요, 카나. 카나도 드레스를 입으면 아주 예쁠 거예요."
"저보단 조장님이 훨씬 더 예쁘시겠지만요."
친구, 로간은 저번과는 다른 의미로 맥이 빠졌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가족처럼 잘 대해주는 멋진…… 친구.
"하, 하하하."
로간은 그의 조장이 이쪽으로 오기 전에 헛웃음을 감추느라 애를 썼다. 안도하니 긴장이 풀린 것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로간?"
"네, 조장님."
"무슨 일 있나요? 조금 평소와 다른 느낌인데……."
"아무 일도 없습니다. 지시하실 것이 있으신가요?"
로간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고 조장은 평소처럼 특별조에 필요한 업무를 지시하고 수행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움직이기 편하게 묶고 달리기 편한 바지와 팔을 움직이기 편한 자켓, 그리고 손을 보호하는 장갑을 두른 조장을 보며 로간은 다음에는 반드시 그의 조장에게 선물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자신이 준 선물도 상냥하고 다정하고 멋진 사람이 준 물건이 되어있기를 바라는 사심 가득한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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