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과 데모닉 일루젼 핸들에 얽힌 카오르와 조장의 이야기
닫힌 아발론 게이트에는 오늘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디이는 조장에게 장난을 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에 바로 또 임무를 떠나게 되어서 자리에 없었다. 조장이 잠깐 난동을 부려서 아발론 게이트가 망가졌었다는 소식을 들은 로간과 아이르리스는 꽤 놀랐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멀쩡한 조장님을 보며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조장님이 선물한 딸기우유를 마시는 엘시도 사건에 대해서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고, 유일하게 카나가 조장의 상태를 신경쓰는 듯이 보였다. 카오르에게 와서 그 무기는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 묻더니, 조장이라면 문제 없다고 하자 안심하고 돌아간 것 같았다.
다만 그 이후, 조장은 며칠째 종종 카오르가 훈련하는 곁에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훈련의 지도나 조언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그 검은 기운의 핸들을 손 안에 감싸안고 앉아있다는 점이었다.
조장이 일부러 환상을 보고 있다면 대체 그 안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카오르가 훈련이나 지시사항의 보고를 위해 말을 걸면 조장은 긴 꿈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장님."
"……."
오늘은 이상하게도 작은 대답마저 없다. 사람의 말을 일부러 무시하거나 할 사람이 못되는 것을 알기에 카오르는 기다리기로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카오르를 본 조장이 다정하게 웃었다.
"천천히 대답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카오르가 불러주면, 왠지 어떤 악몽이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조장이 카오르의 앞에서 그런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은 처음이었다. 카오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했습니다만…… 역시 일부러 보고 계신 건가요? ……악몽을."
어둠을 띤 핸들이 소유자의 정신에 보여주는 환각이란 당연히 정신에 좋지 않은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대화는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거리에 놓여있었고 조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는 맞지만, 단순한 악몽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네요……."
그렇게 하면 너무 슬퍼져버려서, 한 쌍의 핸들이 조장의 허리 한편에서 흔들거렸다.
"꿈…… 내가 보는 건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꿈일지도요. 돌아갈 수 없으니 때론 악몽이 되곤 하겠지만요."
"밀레시안의 시간이라니, 저는 잘 모르겠군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기억을 더듬다보면 걸려나오는 것들이, 이 핸들을 잡고 있으면 아주 잘 보이거든요.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던 나를,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내가 잊어버릴 뻔하는 사실들과 마주하기 위해서."
"레타님께 그런 때가 있었다고요……?"
그 어떤 그림자 세계에도 뛰어드는 영웅이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녀라고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었던 것도 아닐 텐데도.
"있었지만 잘 기억나지는 않아요. 그 때부터 아주…… 아주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그래서 종종 그 핸들을 손에 쥔 채 다니곤 한다. 의식 속에 잠긴 기억들이 환상의 형태로 날아올라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다. 사실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 날 디이를 보기 전까지는.
"하필이면 그 때 디이를 보고 순식간에 기억이 현실로 끌려나온 느낌이 들었어요. 어느새, 강해진 나에게, 강해져서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게 가능한…… 돌아갈 곳이 없는 나에게."
아, 다시 그런 얼굴이다. 동요를 일으켰던 표정과 일부러 환영을 보려고 시도하는 씁쓸한 표정이 반씩 섞인 듯한 얼굴에서 카오르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내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서있다고. 그렇게라도 떠올리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까지 들었으면 알아차려야만 했다. 상상은 가지 않지만, 태어났을 때엔 평범한 다난과 별로 다르지 않던 조장은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 되어버린 여정에 놓였다. 그리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던 일들을 넘고 또 넘어 지금은 카오르와 함께 이 자리에 있다.
그런 사람에게 저렇게 큰 위치를 지닌 사람은 디이의 어디와 닮아있었던 걸까. 카오르는 이번에도 추론을 섣불리 입에 담지 않은 채 들으려고 했고 카오르의 조장은 계속 말했다.
"얼마 전에 조금 뒤숭숭한 일이 있어서 핸들을 손에서 떼지 않았어요. 아무리 환상으로 기억을 더듬어봤자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다가 디이에게 몹쓸 짓을 할 뻔했죠. 지금도 모두에게 미안하게 생각해요."
"아직도 보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는 거군요."
"그래요. 꿈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눈을 감고, 이렇게 해서라도……."
"레타님, 아시겠지만 저는 제가 느낀 것 말고는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 있어요. 제대로 된 푸념조차 아닌 걸 카오르가 들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누구에 대한 것인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강한 밀레시안조차 헤어나오지 못하는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들어주는 이가 있다. 그녀가 밀레시안의 삶에서 지녀보지 못했던 존재였다.
카오르는 그런 것은 모른 채, 강건하게 말했다.
"레타님의 머릿속을 제가 다 알 수야 없지요. 하지만 힘이 되어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은 허언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말씀해주신다면 저는 제 나름대로 듣고 판단해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카오르……"
"제가 조장님께 아버지와 관련된 일을 털어놓고 후련해졌듯이, 조장님께서도 내키는 만큼 저를 의지해주셔도 됩니다. 의지도 되지 못할 견습일 뿐일지도 모르지만요."
"……카오르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카오르는 아주 듬직한 사람인걸요. 조장이 그 뒤에 삼킨 말을 카오르는 듣지 못했다.
어디에나 갈 수 있지만 어디에도 있지 못하게 된 밀레시안보다, 훨씬 더요.
카오르의 조장이 다시 도서관에 가자고 제의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외출이라면 마다할 이유도 없었고 장소가 도서관이라면 더욱 그랬다. 조장은 가만히 책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책을 꺼낼 생각이 없는 것처럼.
"카오르, 조금 얘기를 해도 될까요. 어쩌면 상담일지도요."
이전이라면 도서관에서 떠드는 건 안 된다고 말했겠지만, 최근의 조장을 연이어 지켜보며 융통성이 생긴 카오르는 대답했다.
"말씀하시고 싶으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책을 쌓아둔 탁자에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것은 도서관에 온 주제에 책을 읽지 않아서였다. 카오르는 예전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이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조장은 어느새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살포시 내려놓은 책은 당연히 카오르가 아는 표지였다.
"이 책, 저번에 카오르가 골라줬었죠."
"기억합니다."
"타르라크가 어떤 사람인지 아나요?"
"여신을 구출하지 못한 세 용사의 한 사람…… 덧붙여 뛰어난 드루이드였지요. 이름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책들도 몇 권 있었고요. 설마 그 책에 적힌 것처럼 되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요."
"내가 이걸 읽는 걸 카오르는 보았으니까, 어차피 숨기는 건 거짓말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조장은 거짓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했어도 간파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카오르는 듣고 있었다.
"카오르가 추천해주기 전에 이 책을 본 건 정말로 우연이었죠. 관심을 가지고 책을 써서 놓아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불현듯 나는 이런 흔적과 마주하게 되곤 해요. 그럴 때마다 생각하죠, 내가 잊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만큼이냐고."
"조장님이 잊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니……."
"이상한가요?"
"누군가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처음 보았으니까요."
"후후, 그렇네요. 이제 볼 수 없는 사람이라 그렇겠지만요."
말의 울림이 무거웠다. 기록의 마지막, 봉인된 땅에서 사라진 타르라크라는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카오르는 물을 수 없었다. 조장은 그 책 위로 카오르가 몇 번이고 보았던 그 무기를 올려놓았다. 책과 핸들, 조장이 다시는 볼 수 없다고 말한 이들과 이어지는 선이었다.
"카오르는 이걸 손에 들면 무엇이 보이나요?"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죠. 내용은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군요. 그건 조장님도 마찬가지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전에 조금은 얘기했었지만, 내가 가장 선명하게 보는 건 보고 싶지 않아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잊고 싶지 않아서 그러신 게 아닌가요?"
"달라요.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니까."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의 이런 속내를 직접 듣는 게 처음이란 사실을 모른 채 카오르는 경청했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은 의식적으로 떠올리고 싶어요. 잊을 수 없는 건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는 느낌이에요. 아마 이 책을 보지 않았어도 저는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서 이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타르라크, 당신은 오히려 없는 지금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그리고 굳이 이 핸들을 잡지 않아도, 언제나 그 사람을 간직하고 있기는 해요."
……. 당신이 뜻했던 것이 아니어도, 한때 바랐던 것이라도 지금의 내가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오만일까요?
"카오르는 내가 생각하는 그 양쪽 모두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내가 아발론 게이트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날부터, 어쩌면 조금 더…… 전부터요."
"제가 실제로 조장님의 속을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쭉 보고 있었잖아요? 난 굉장히 둔한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경험이 쌓이면 그정도는 알 수 있어요."
"신경이 쓰였던 것뿐입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다시 말하고 싶은 거예요."
추태를 보였는데도 변함없이 곁에 있어주는 카오르의 한결같음에 그녀는 거듭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오르가 말해준 대로, 조금 카오르를 의지해볼까 싶어졌어요. 내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는 건 꽤 마음이 편한 일이네요. 카오르가 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고, 즐거워졌다고 해주었던 것처럼요."
"갑자기 말씀해주신 연유는 이거였군요."
"저, 이런 건 처음이라서 카오르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언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기도 했고……."
"아니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금은 말해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지 않을 거라면 조장이 굳이 카오르의 곁에서 핸들을 든 채 생각에 잠겨있을 리가 없었다.
"솔직히, 조장님께서 잊고 싶지 않다거나 잊을 수 없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이야기를 들어도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조장님의 얼굴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건 알았습니다."
"편하지는…… 않네요."
"동시에 그런 얼굴까지도 조장님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을지도요."
아발론의 다른 조원들은 결코 알지 못할 테지, 카오르는 조장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카오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는 이런 일이 정말로 처음인 듯이 보였다.
"언젠가는 레타님도 전부 말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지요, 레타님을 그런 얼굴로 만드는 일들에 대해서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는걸요.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란 건 어렵네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기도 하니까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환상에까지 손을 뻗어도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어요. 가장 어리고 약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와,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사이에서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내가 이 땅에 내려온 밀레시안이고, 너무 많이 달라져버렸다는 거예요."
"제가 아는 건 지금의 조장님뿐입니다. 제가 따르겠다고 생각하고, 힘이 되어드리고 싶고, 조장님이라 부를 만큼 강한 분이요."
조장이 조종하는 인형의 예술적인 움직임만큼이나 당신도 강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재간은 카오르에게 없었다.
"강해지려고 해서 강해진 적은 사실 없었지만…… 카오르가 그렇게 말해주니, 조장을 맡고 카오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기쁜걸요."
"질투가 나는 이야기군요. 보통은 목표 없이 그렇게 강해질 수 없습니다."
"실례가 되는 말이었을까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강해져야겠다는 의식이 있기 전에 가장 위험한 곳에 살아있었어요. 그게 강하다는 증거라고, 모두들 말하니까요. 내가 나를 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일 거예요."
"조장님은 약한 게 아니라 무르신 거겠죠. 약하고 어설픈 분을 제 목표로 삼았던 적은 없습니다."
"어라, 목표로 삼았었나요? 처음 듣는 얘기인데."
표정이 조금 풀린 소녀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무심코 속에 담고 있던 말을 흘려버린 카오르에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랬습니다. 말씀드린 적은 없었군요."
"종종 카오르가 인형에 대한 걸 물어볼 때면, 좋은 인형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었어요. 설마 내가 목표일 거라고는, 쑥쓰러운데요."
"당신은 제 목표가 될 정도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에린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제가 아는 최고의 인형사니까요."
"와아……."
조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오르가 있는 쪽을 보았다. 카오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카오르가 이렇게 솔직하게 날 칭찬하는 게 즐거워서요."
"앞으로도 제가 칭찬할 만한 분으로 계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특별조에 있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정말 대놓고 말하는 카오르를 보며 기운을 얻었는지 밀레시안 소녀는 꽤 밝게 웃고 있었다. 카오르가 유쾌하지 않다고 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제법 즐겁게.
"카오르를 위해서라도 정진해야겠네요."
아무리 강해져도 떨쳐버릴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가끔은 기억을 이끌어내는 환상 속에 파묻혀서 스스로를 질책하며 보내고 싶은 시간들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앞을 볼 수 있기에,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카오르가 나를 목표했던 부분을 뛰어넘게 된다면, 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지만, 지켰다고 해서 손 안에 반드시 기쁨만이 남아있지는 않다는 씁쓸함을.
"그렇게 되면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판단이나 관찰 같은 건 잘 몰라요. 그냥, 그래도 된다는 기분이 들면 하니까요. 지금도 카오르와 이렇게 이야기해도 된다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도 이런 말들을 들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가 그랬듯이, 혼자서 끌어안고 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가끔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신 건 조장님이십니다."
앞으로 함께 더 긴 시간을 보내면, 이렇게 대화할 날도 늘어날 것이다.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이 변화하고 성장해가며 알아갈 수 있도록.
"그럼 나를 목표로 삼은 만큼 엄격하게 훈련시킬 거예요."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요."
"위험한 임무를 다녀와도 괜찮겠네요."
"마다하지 않습니다."
"혹시 다치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내가 도와줄게요."
"저는 조장님께 그렇게 지켜지기만 할 생각은 없는데요."
더 이상 환상에 침범 당해도 끄떡하지 않을 것처럼 자신 있게, 카오르의 조장이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언젠가 카오르의 콜로서스로 내 마리오네트를 쓰러뜨리고 나서 그래주세요."
"윽……."
오래간만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카오르가 순간 말로 지고 말았다. 아직도 조장과 압도적으로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니 별 수 없었다. 조장과 나란히 서려면 일개 견습 기사를 넘어 정식으로 기사가 되고, 그 뒤에도 한참 더 나아가 카오르가 존경하는 아벨린처럼 훌륭해져도 모자랄지도 모른다고, 카오르는 그렇게 먼 미래를 보았다.
아직, 나는 당신이 바라보는 것에 손끝조차 닿기 어려우니 당신을 깊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무의미한 처사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말해주시지 않는 것들을 멋대로 추측하고 재단하는 일은 삼가야겠지요. 제가 멋대로 아버지를 억측했던 때처럼 어리석은 행동은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오늘은,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만이라도 조장과 나란히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하기 전에 카오르는 책상 아래에서 손을 폈다. 거기에는 조장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카오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환상을 보여주는 핸들을 쥐었다 편 손에는 가시넝쿨을 잡았다 놓은 것처럼 찔리고 패인 흔적이 악몽 같은 환상을 건너와 현실에 있었다. 아직 자격이 없는 자에 대한 질책이었다.
당신의 등 뒤를 따라가다보면 이런 것들을 손 안에 끌어안고도 지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카오르는 본래의 목적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조장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는 아직 조장을 따라갈 수 없는 소년 견습 기사의 다짐을 새기는 증거였다.
'……내가 보는 건.'
상처 너머의 환영에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 있다. 카오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죽은 자들의 안식마저 방해하는 것들. 시체의 산을 넘어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쓰러뜨린 무언가의 얼굴이 아는 이들의 조각으로 변해있곤 했다. 디이, 아이르리스, 로간, 카나, 엘시, 그리고…….
어느새 눈앞에 가득 조장의 얼굴이 있었다. 카오르가 숨을 삼키기 전에 그녀가 물었다.
"저기, 이만 돌아갈까요? 피곤해보이는데……."
"오늘은 그러죠. 즐거웠습니다."
다 읽지도 않은 책을 정리하며 카오르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먼저 나간 조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카오르는 상처자국 위에 다시 가시를 쥐었다.
시체 더미를 밟고 올라선 소녀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몸으로 이쪽을 돌아본다. 슬픈 미소가,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밀레시안은 몸만 남은 시신이 되고, 썩은 핏물에 섞여 사라져갔다.
"카오르?"
"갑니다."
언젠가는 이 환상 속에서 당신을 구할 수 있는 날까지, 이 손에 아픔을 새기는 일을 관두지 않겠다는 마음을 갈무리하며 카오르는 조장과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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