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과 데모닉 일루젼 핸들에 얽힌 카오르와 조장의 이야기
후편에서 이어집니다
"야 카오르, 나 어떠냐?"
갑옷을 뒤집어쓴 거인 앞에서 카오르가 얼굴을 들어 임무에서 막 돌아온 디이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견습 기사 옷이 아닌 은색 갑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디이가 의기양양하게 서있었다. 공구를 든 채 카오르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울리네."
훈련 중에는 원래 누가 무슨 말을 하든 크게 관심이 없는 카오르였고, 디이도 알고 대충 놀러온 것이었다.
"그치? 이야, 언제쯤 되어야 이런 걸 입고 기사가 될지 모르겠다니까."
디이는 그럴 듯하게 외관을 꾸며야하는 임무를 다녀왔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슈안이 준비해주었을 중갑옷은 힘이 센 디이에게 딱 맞았다. 그런 장비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카오르는 제 키보다 높은 마리오네트를 보며 고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반응이 영 심심한데?"
"훈련 중이야, 말 시키지 말라고 했지."
"조장님이 아직 안 오셔서 심심하단 말이야. 그거 재밌냐?"
"훈련에 재미있고 없고가 중요해?"
"차라리 검술 훈련이라면 모를까, 난 네가 이걸 만지고 있을 때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구."
"아직 나도 알아야할 게 많아."
고도의 섬세한 기술과 그것을 뒷받쳐줄 힘이 마리오네트 조작에 필요하다는 것은 카오르도 이론상 잘 알고 있었다. 카오르는 망가진 인형을 수리할 때마다 자신이 아직 이 정교하고 예술적인 무기를 다루기에 부족하다는 점을 통감했다. 인형사에게는 또 하나의 몸이나 다름없는 콜로서스 마리오네트의 줄을 만지며 생각에 잠긴 카오르 곁에서 지루해하던 디이가 벌떡 일어났다.
"여, 조장!"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오던 조장이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멈춰섰다. 벨테인 특별조 견습 기사들의 조장인 소녀는 오늘도 변함 없는 모습이었다. 프릴이 드문드문 달린 가벼운 드레스에 귀여운 구두, 단정하게 여러 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카락까지 영락 없이 그들의 조장이었지만, 디이와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소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카오르의 눈에 비쳤다.
"레타님,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카오르는 조장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물었다. 그녀가 주춤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디이도 눈치는 챘지만, 카오르처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장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왜 그래? 내가 너무 멋있어서 넋이 나갔어? 역시 견습 기사 옷은 영 아닌 걸 조장도 알아주는구나!"
"아……."
조장은 입만 벙긋거릴 것처럼 머뭇거리며 말이 없었다. 카오르는 이전에도 조장의 이런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디이는 그렇지 않았다. 장난기가 동했는지 디이는 두 팔을 벌리고 조장을 향해 걸어갔다.
"10일도 넘는 임무여서 조장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조장은 나 안 반가워? 인사도 안 해주네."
"디이."
"……."
"조장?"
"디이, 물러나!"
"우왁!"
아발론 게이트로 들어오던 조장의 손에 위협적으로 가시가 돋아난 듯이 생긴 핸들이 원래 들려있었던 것을 주의력이 부족했던 디이가 알 리 없었다. 그 무기를 제대로 잡기 전까지 가늘게 떨리던 소녀의 손은 매섭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형체를 갖추어 나타난 거대한 갑옷 인형이 앞으로 돌진했다. 인형만큼 두꺼운 갑옷을 입은 디이가 옆으로 굴렀다.
"무슨 짓이야!? 나한테 뭐 감정 있었어 조장?!"
"피하기나 해 디이!"
카오르의 바로 근처에 있곤 하는 엘시마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무기를 두 손에 쥔 채 가까이 왔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카나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로간과 아이르리스는 부재중, 강력한 마리오네트와 마주하며 카오르는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가 그만두고 검을 뽑았다.
카오르의 조장은 이멘 마하 인형 공방의 장인 휴가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인형사였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아무리 위대한 밀레시안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카오르는 조장이 가볍게 좀비들을 물리치고 왔던 날 물었었다.
"그 좀비들을 어떻게 쓰러뜨리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실력은 확실히 조장으로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 이렇게 하면 간단하니까요."
조장이 카오르의 눈앞에서 펼쳐보인 것은 실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인형이었다. 조장이 핸들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형을 실제로 보고 나니 그 움직임에 경도된 카오르는 이 사람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오만이 아니었나 하고 순간 생각했다.
인형술은 에린에 그리 널리 보급되지 않은 기술이었다. 배우기도 까다롭고 고된 훈련을 거친 뒤에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많지 않은 탓이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 안의 생각만으로도 벅찼던 카오르는 그제야 조장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고도로 숙련된 인형사가 아니면 도저히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검은 핸들은 카오르에게는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지만 손에 쥘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조장에게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인 무기였다.
조장이 견습 기사들 앞에서 전투 기술을 펼칠 일은 그다지 없었지만, 인형을 움직이는 실의 유려한 움직임을 조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핸들와 와이어에 압도적인 힘을 싣고 정교한 조작으로 다수의 적도 가볍게 무력화시키는 우아하고도 전술적인 전투, 그건 카오르가 언제나 연구하고 훈련하며 바라던 방식이었다. 손에 든 무기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고, 더 넓게 전장을 살펴볼 수 있도록.
직접 보고 듣고 겪기 전에는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카오르는 아발론 게이트에서 조금씩 깨달았다. 아마 조장이 인형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인정했을 터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밀레시안이 에린을 몇 번이나 구했다고 들었을 때에는 알반 기사단보다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조장의 말과 행동에서 묻어나는 진심과 경험, 그리고 솔직히 카오르는 제대로 쥐는 것조차도 힘든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을 보자, 첫인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의 명성은 헛되지 않으며, 이 사람은 나같은 것보다 한참 멀리 가 있구나 하고.
카오르는 지금 그런 조장의 마리오네트와 대치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리오네트에게 노려지는 디이에게 문제가 없도록 중간에 끼어들었다. 당황에서 벗어난 디이도 검을 빼어들고 위치를 잡았다. 망치의 손잡이를 꼭 쥔 엘시가 불안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나가 어떻게 해야할지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별 전력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견습 기사 전원이 전력을 다해 덤벼도 상대하는 것조차 무리일 사람이었다. 디이와 카오르 둘이서는 조장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인형의 손아귀에 한 번 붙잡히면 끝이었다. 디이가 검을 들고 몇 번 그 인형의 팔을 힘겹게 쳐내는 사이, 카오르는 지혜를 짜내려고 했다.
"야 카오르, 조장 왜 저러는 거야? 내가 뭐 그렇게까지 잘못했어?!"
"생각 중이니까 조용히 해봐!"
단서는 조장이 원래부터 손에 쥐고 있던, 사용자의 자격을 끔찍하게도 시험하는 핸들과 오늘따라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던 디이. 계속 돌진하거나 와이어로 상대를 휘감는 인형의 동작을 틈을 노려 피하면서 카오르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이건 명백히 장난이 아니었고 디이는 계속 조장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나마 인형의 움직임이 평소의 조장이 하던 것보다 조금 느리기에 망정이지 실전 상황이었으면 디이는 아마 꼼짝도 못하고 저 와이어에 목이 졸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조장의 초록색 눈동자가 둔탁하게 느껴졌다. 몸은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말이었다.
"레타님! 디이가 멍청한 짓을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진정하세요!"
"역시 내 탓이란 거야?"
"……나는."
"큭!"
콜로서스 마리오네트가 크게 휘두른 팔을 피하지 못한 디이와 카오르가 같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온 몸이 아프긴 해도 다친 곳은 둘 다 없었다. 조장은 끝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신을 쓰러뜨…… 리지 않으면…… 언제나……."
"젠장, 디이! 비켜봐!"
"어디로 비키란 거야 여기서!"
"조장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면 돼!!"
뭔지 모르겠지만 카오르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디이가 몸을 날려 갑옷 거인의 일격을 피하고 조장의 뒤로 돌아갔다. 조장이 자기가 조작하는 인형보다 뻣뻣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기 전에 카오르는 허리에서 핸들을 뽑았다. 색은 조금 다르지만, 그의 조장이 쓰는 것과 거의 동일한 무기였다. 어딘가 불길하고 가시가 돋아난 듯한 모양의 핸들에서는 지울 수 없는 검은 기운이 묻어났다.
카오르는 이를 악물고 조정중이던 콜로서스 마리오네트에 와이어를 연결한 뒤, 얼마 전 조장이 가르쳐준 대로 핸들을 힘껏 당겼다.
'딱 한 번이면……!'
카오르와 조장 양쪽이 손에 든 그 무기가 어떤 성질을 띠고 있는지, 그 자리에서 오직 카오르만이 알고 있었다. 조금 충격을 줘서 무기에서 손을 흔들리게 만들면 조장이 제정신을 차릴지도 몰랐다.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망울을 지니던 밀레시안 소녀의 저런 표정은, 카오르가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무척 신경이 쓰였다. 손바닥과 머리가 웅웅 울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와이어에 특정한 방향으로 힘을 주고, 감아서 당겼다가 손을 휙 끌어당긴다. 카오르는 성공을 예감했다.
쿵! 하고 두 갑옷 거인이 충돌했다. 움직임이 멎었다. 조장의 손끝에서 와이어가 늘어졌다. 카오르도 손에서 힘을 뺐다. 잇몸이 상하기 직전까지 악물었던 이를 떼고 검은 기운의 핸들에서 해방되려던 순간, 조장이 멍한 얼굴로 손을 당겼다. 카오르는 아차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카오르가 종종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콜로서스 마리오네트가 주먹을 치켜들고 파괴적으로 바닥을 내리친 순간, 엘시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뻔한 것을 카나가 받아주었다. 카오르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었다. 휘청거리기만 한 디이의 뒤로 다급하게 저 편에서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아벨린님, 레타님이 어디 아프신 게 아닐까요?"
"혹시 저분이 또 움직이면 막을 준비나 하렴, 알터. 아발론 게이트가 더 망가지기 전에."
사정 봐주지 않고 움직여버린 마리오네트 탓에 바닥이 약간 파여있었다. 이런 식으로 인형이 계속 날뛰었다간 아발론 게이트의 절반은 부서질 터였다. 아벨린의 곁에서 알터가 긴장한 얼굴로 디바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쥐었지만, 다행히 뽑아들 일은 없었다. 아벨린이 크게 한숨을 쉬며, 평소에 가까운 얼굴로 돌아온 조장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이셨던 거죠? 설명을 해주셔야할 것 같은데요."
"……미, 미안해요. 그게, 좀……."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할 말을 찾는 소녀는 손에서 핸들을 떼어놓고 와이어와 마리오네트를 전부 회수했다. 카오르는 나머지 무릎마저 푹 꺾어 바닥에 대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무기에 손을 댄 대가로 기력 소모가 막심했다. 그의 앞에는 얼마나 수리해야 고쳐질지 알 수 없는 콜로서스 마리오네트가 관절이 꺾이고 부러져 주인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위험한 걸 무기로 쓰고 계셨단 말이죠?"
아벨린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문제의 핸들은 지금은 아무 이상도 없어보였다. 아벨린이 핸들 같은 무기에 대해 그리 잘 알 리는 없었다. 그다지 변호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카오르가 사실을 덧붙였다. 그 검은 기운을 띤 핸들은 사용자에게 환상을 비추어 정신의 혼란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무기이지만, 사용자의 자격을 시험할 뿐이라고.
"최고의 인형사만이 쓸 수 있는 무기입니다. 재능이 있는 자라면, 특히 조장님이라면 평소에는 아무 문제도 없으셨을 겁니다."
"그, 그래요. 저걸로 계속 싸워오셨지만 별 일 없었잖아요."
"오늘은 별 일이 있었긴 하죠. 레타님,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무기와 멀어지시는 게 좋겠네요."
"……그럴게요, 아벨린. 폐를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
부서진 바닥과 일부 기물 때문에 한숨 짓는 슈안의 옆에서 카오르의 조장은 책임지고 자신이 전부 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벨린과 알터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엘시는 망치를 품에 꼭 안고 아직 불안한 듯이 눈을 깜빡였고 카나는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디이는 조장이 원래대로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웃고 있었지만 카오르는 여전히 심각했다.
디이가 장난을 걸어도 하나도 받아주지 않을 만큼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카오르에게 조장이 다가온 것은 몇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카오르."
"……레타님."
"카오르에게도 사과해야하는데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카오르의 마리오네트, 부숴서 미안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치면 되니까요."
"나를 말리려고 그런 거니까, 도와줄게요."
평소의 카오르라면 자기 무기 정도는 스스로 고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거절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장이 놀라운 속도로 아발론 게이트의 복구를 끝내고 돌아와 인형 수리 도구를 펼친 지금까지 콜로서스 마리오네트에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카오르는 꽤 깊게 생각에 잠겨있었다.
지금의 조장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솜씨로 마리오네트를 수리하는 모습은 과연 카오르가 아직은 등을 바라보는 것도 벅찬 경지에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지닌 핸들은 가방 안에라도 넣어두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오르는 조심스럽게, 조장이 오늘 평정을 잃어버렸던 것은 굳이 핸들의 탓뿐만은 아닐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런 얼굴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레시안 소녀를 조장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카오르가 그의 조장이 동요하는 것을 본 첫 번째 사건은 조금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조장과 외출한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카오르는 조장이 생각보다 여러가지 분야에 지식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내심 기뻐했었다.
"조장님은 역시 경험이 많으시군요."
"그냥, 울라도 이리아도 오래 돌아다녔으니까요."
"귀중한 일이지요. 실제 체험할 수 없는 것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만"
조장은 그런 카오르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밀레시안은 아무래도 투아하 데 다난보다 몸이 튼튼한 편이라, 무슨 일이 있으면 몸으로 먼저 돌진하는 일이 꽤 잦아서 때론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깨달았다고 조장은 말했다.
"다른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은 별로 없었네요. 도서관에 오는 것도 그렇고요. 책을 느긋하게 읽을 시간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에요."
"저라도 괜찮다면 제가 읽은 책을 추천해드리죠."
조장은 기뻐하며 도서관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꽤 어수선한 행동이었지만 구두를 신고 사뿐사뿐 걷는 행동이 그렇게 방해되지는 않았다. 카오르가 책을 고르는 사이 책장 하나 하나를 눈으로 즐겁게 살피던 조장이 조금 이상해진 것은 그때였다.
"……."
"레타님."
"……."
"레타님?"
"아, 네, 카오르. 무슨 일이에요?"
카오르가 조장의 앞에 있는 책을 태연하게 꺼내들고 앞의 책상에 쌓았다. 몇 권의 책 가운데에서 조장님은 어떤 것이 마음에 드시냐고 묻자, 한참 망설이던 조장의 시선이 한 권에 가서 멈췄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에게 시선을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카오르는 그게 조장이 동요한 원인이라고 확신했다.
"이걸로…… 할게요."
"그렇군요, 저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조장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내용에 대해서 묻지도 않은 채 책을 품에 끌어안고 의자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도서관에 자주 오는 카오르가 전에 본 적은 있는 책이었다. 그 때는 흥미롭기는 해도 그리 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얇은 책등에 새겨진 제목을 카오르는 똑똑히 기억해두었다.
타르라크의 기록.
조장은 언제나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그 날 그 책을 읽을 때에는 더욱 진지해보였다. 카오르는 나중에 다시 도서관에 와서, 세심하게 그 책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때와 감상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 내용이 끊겨버린 듯한 기록이었다.
봉인된 여신을 구출하기 위해 떠났지만 그 행방이 묘연해졌던 세 용사의 이야기, 알반 기사단이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모두가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이런 저런 지식에 관심이 많은 카오르가 들은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 세 용사의 한 명인 타르라크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도서관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 책과 처음 마주쳤을 때 카오르도 조금 놀랐던 점이었다.
조장이 그토록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니 카오르가 모르고 지나친 대단한 내용이 있나 싶었지만, 여전히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는 적혀있지 않았다. 여신을 구출하지 못한 용사인 타르라크의 행적을 누가 기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시드 스넷타라는 봉인된 땅에 가서 직접 타르라크라는 인물을 만나본 사람일 거라는 추측 정도만 가능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몸이 망가진 용사는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하루하루 혹한의 땅에서 목숨을 이어나갔다. 가끔 그 설원까지 온 누군가와 만남을 가지는 것이 몇 번 목격되었고 기록 속의 그는 계속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봉인된 땅을 떠난 뒤의 행적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기록은 그렇게 더 이어지지 않았다. 먼 옛날 이야기처럼.
그 뒤 조장이 지시한 임무를 다녀오면서 카오르는 조장의 반응이 신경 쓰여 남몰래 살짝 알아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사라져버린 세 용사에 대한 이야기는 허무하게 떠돌고 아무도 카오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카오르의 머릿속에서 조장과 타르라크라는 인물 사이에 선이 하나 이어졌다. 조장이 그림자 영웅이 되기 전의 일은 카오르도 자세히 들은 적은 없다. 기사단에 알음알음 알려진 바로는 조장이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으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 여신을 구출한 일이라고 했다. 여신을 구출하기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세 용사 중 하나인 타르라크를 만났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논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런 이에 대한 기록을 보고 어째서 동요하였는지, 조장에게 직접 묻기라도 하지 않으면 카오르 혼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일이었다.
카오르는 오늘의 조장과 디이의 사이에도 추론의 선을 하나 이었다. 조장이 공격하려고 했던 것은 아마 디이가 아닐 거라고, 카오르는 그렇게 변호하지는 않았었다. 그저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핸들이 보여주는 환영에는 숙련자라도 때로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고만 말했다. 그의 조장이 아마도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사실 디이만을 노리고 있었다고 들키면 안 될 것처럼, 조장은 위대한 밀레시안답지 않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건 카오르가 지난 날 도서관에서 보았던 동요와 무척 닮아있었다. 인간은 보통 그런 얼굴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했을 때 가지게 된다고 카오르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디이, 정확히는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의 디이에게서 조장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레타님."
카오르라면 며칠 걸렸겠지만 조장의 손이 닿은 카오르의 마리오네트는 단시간 내에 수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카오르가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이미 꽤나 시간이 흘렀고, 조장이 최고급 수리도구를 기꺼이 꺼내서 사용한 덕분이기도 했다. 조장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때요, 카오르?"
"잘 고쳐졌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러시는 편이 조장님의 마음이 편하실 것 같았으니 그러시라고 했지만요."
"당연히 해야죠, 내가 부서뜨렸는걸요."
"그렇게 치면, 레타님의 분위기를 읽지 못한 디이의 책임도 있을 겁니다. 디이가 장난을 치려고 한 게 잘못한 거죠?"
"그건……."
확신한 상태인 카오르는 물러나지 않았다.
"디이 녀석 대신 제가 사과드리고 싶군요. 디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레타님도 그정도로 반응하시진 않았을 거고, 제 콜로서스가 이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을 거고요."
"아……."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디이와 카오르를 동시에 몰아붙이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기는 했다고 생각하며, 카오르의 조장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역시 카오르는…… 알고 있었던 거군요."
"디이의 장난은 때와 장소를 조금 더 가려야겠지요."
소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전부 내 탓이에요. 디이는 아무 영문도 모를 테니까요. 디이에게는…… 역시 미안하게 됐어요, 콜로서스에게 제대로 공격당했더라면 보통 부상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다행이에요."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영원히 모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카오르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핸들이 보여주는 환상에 잠시 지배당한 조장이 진심으로 디이를 쓰러뜨리려고 들었다는 것을 알아봤자 좋을 건 없었다.
거의 수리가 끝난 인형을 앞두고 공구를 올려둔 탁자에 걸터앉은 조장은 말이 없었다. 카오르는 자신이 먼저 말해야할 때라고 느꼈다.
"아무리 일루젼 핸들의 영향이라고는 해도 레타님이 그리 행동하신 연유를 제가 묻는 것은 건방진 일이겠지요.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괜찮습니다."
"……."
"하지만 제가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오늘은 전력으로 레타님을 말리려다가 이 꼴이 되는 것밖에 하지 못했지만요."
"카오르……"
처음에는 얼토당토 않은 조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듣고 이 아발론 게이트에서 만난 조장은 전장보다는 다과회가 훨씬 어울릴 법한 귀여운 얼굴을 가진 소녀로만 보였다. 로간이나 카나가 왜 그렇게 처음부터 조장을 따르려고 하는지, 카오르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걸어오는 조장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생각을 바꾼 카오르는 이 순진한 얼굴의 소녀가 예상보다 사려 깊고 경험이 많으며 동시에 밀레시안다운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라고 알게 되었다. 카오르가 마음에 지니고 있던 고민에 손을 내밀어주고, 진심이 아닌 말은 입에 담지 않으며, 해야만 하는 일을 관철하는 데에 모자람이 없는 힘을 지닌 밀레시안. 조장이라고 부르고 따를 만큼 자신과 격차가 있으며, 언젠가는 그 등 뒤를 따라가 나란히 서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가 되었다.
지금의 조장은 평소처럼 웃고 있기는 했지만, 카오르는 거기에서 그늘을 느꼈다.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카오르 덕분이에요. 카오르가 소중한 콜로서스를 아끼지 않고 나를 막아준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그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조금 의문이 드는 점은 있지만요."
"뭔가요?"
카오르는 견습 기사 옷 한쪽에 언제나 매달아둔 핸들을 조장의 앞으로 내보이며 말했다.
"이 핸들…… 물론 조장님이 사용하시는 쪽이 훨씬 성능이 좋겠지만, 이게 어떤 물건인지는 기본적으로는 같겠지요. 그래서 아까 아벨린님께도 제가 대신 말씀드릴 수 있었던 거고요."
"직접 만져본 카오르라면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손을 대는 것조차 힘겨운 물건이지만…… 레타님께서 제 앞에서 처음으로 이 핸들로 인형을 조작하신 순간 솔직히 레타님을 제가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장님은 전혀 이 핸들에게 지배당하실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것이 마스터급 인형사의 능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밀레시안은 그 점에 대해서는 태연했다.
"그렇기는 해요. 종종 이상한 것들이 보이지만, 아주 작아요. 그런 건 내 마리오네트에게 집중하면 보이지 않으니까요."
견습 기사에겐 아직 너무도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조장 앞에서, 카오르는 고르고 고른 말을 꺼냈다.
"오늘 디이를 보셨을 때의 조장님은…… 핸들을 손에 쥐고 계셨지요. 처음부터 무언가 환상을 보시던 것처럼, 그리고 순간 디이에게 반응하셨고요."
"카오르……."
"추궁하려는 게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조장님께 힘이 되어드리기 위해서는, 조장님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하니 조금 조장님을 지켜보고 생각해낸 것뿐입니다. 만약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또다시 레타님을 전력으로 막겠지요. 제가 할 수 없다면 아벨린님을 모셔와서라도 그렇게 할 겁니다. 다만……."
카오르는 언제나 진지했고, 지금은 진심이었다.
"평정을 잃으신 레타님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던 수리 작업이 끝난 모양이다. 카오르의 조장은 가방 안에 수리 도구를 전부 갈무리하고는, 안에서 문제의 핸들을 꺼내 허리에 매었다. 보기 드물게 씁쓸한 얼굴로 소녀가 대답했다.
"카오르에겐 좋지 않은 모습을 자꾸 보이게 되네요."
그런 적은 단 두 번뿐이니, 이 소녀도 도서관에서 보였던 모습을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자 카오르는 가볍게 대답했다.
"저도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린 적이 있으니 피차일반이라고 해두셔도 됩니다."
"……응, 고마워요."
원래대로라면 카오르에게 임무를 지시하기 위해 왔을 조장은 그럴 틈이 없어보였다.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고개를 까닥거리던 조장을 카오르는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카오르."
"네, 말씀하시죠."
"잠시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될까요?"
"그러세요."
소녀는 부드럽게 웃으려고 하면서, 두 손 안에 그 검은 기운을 쥐었다.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어설픈 환상 따위에 쉽게 지배당하지는 않는다. 환영에 현혹되어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잠시 물드려는 것처럼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자격이 없는 자가 저 핸들을 손에 들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햇병아리 인형사인 카오르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검이나 창 따위의 무기가 아니어서 일단 조금 나을 뿐이지, 무시무시한 환상에 빠져든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까 전의 카오르는 환각이 머릿속을 파고들기 전에 손에서 떼어놓았기에 무사할 뿐이었다.
연습용으로야 더 간단한 핸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저 핸들을 들어도 정신이 전혀 침범당하지 않을 만큼 강한 자가 되어야했다. 그 강한 자의 표본이 눈앞에서 바로 그 핸들을 손에 쥔 채 명상을 하듯이 앉아있다.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느낀 카오르는 늘 읽고 있던 책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책장은 순조롭게 넘어갔고 아발론 게이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웨카가 떠오르고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등불 없이는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을 때쯤 카오르의 조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번 다시는 오늘 낮 같은 일이 없도록 할게요."
"네, 그러시는 편이 좋겠죠."
"하지만 만약, 내가 또 앞뒤 분간 못하는 행동을 한다면 카오르는…… 나를 막아줄 건가요?"
카오르는 저다운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조장님."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 힘이 되고, 당신과 같은 위험한 무기를 들어도 버틸 수 있는 훌륭한 기사가 되어 곁에 서고 싶다고. 그런 마음을 소년 견습 기사는 가슴에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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