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님께서 신청해주신 톨비밀레 중편 커미션입니다.
총 2만 6천자 분량에서 1만 6천자 정도만 잘라서 공개합니다.
이 블로그에 있는 밀레시안 첼의 연성인
그 피는 누구를 위해 흘리는가(링크) / 숨쉬는 자에게 고한다(링크)
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별 말 없으셔서 놀랐습니다. 솔직히 거절하실 줄 알았거든요."
이 남자는 늘 이런 식으로 말한다. 첼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상대방에게 속을 내보일듯 하다가 결국 상대방의 의도를 찌르고 슬쩍 물러나버린다. 기후가 바뀌는 경계지점에서 서서히 얼기 시작하는 뺨 위로 모자를 눌러쓰며 첼은 대꾸했다.
"거절했다고 안 따라왔을 거야?"
"그건 확실히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저번 일도 있고 하니 역시 신경쓰였겠지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동행시키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저번 일, 첼은 그에게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 싶었다. 특별조 조원들을 빈사 상태로 만들뻔 했던 사건에 대한 얘기였다. 그가 막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성적으로 멈추긴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로 조원들을 죽을 때까지 몰아붙였다면 그 뒷일은 어떻게 됐을지 이제 와서는 모른다.
추위 따위가 침범하지 못할 듯이 중갑옷으로 몸을 싸맨 금발의 기사가 그 날 첼의 숨통을 조였다. 조금 더 이전에, 누군가 밀레시안들의 영혼에 직접 손을 뻗었을 때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악귀가 되어버렸던 악몽 같은 기억. 그 어느 날 이후로 소울 스트림에 생겨버린, 쳐다보기만 해도 빨려들어갈 듯한 심연. 소울 스트림의 인도자는 그곳을 아는지 모르는지 갸날픈 미소만을 짓고, 첼은 의례적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 돌아와버렸다.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금씩 커진다고 느꼈을 때가 지난 번 사건이었다. 무언가를 괴롭히는 데에 취미가 있던 것도, 약한 것을 눌러서 죽이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그저 그 때의 악귀처럼 무작정 날뛰고 싶다는 충동을 비집어 벌린 것은 아주 사소한 말 하나, 행동 하나, 어쩌면 그냥 바람이 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영혼 너머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균열을 더는 내버려둘 수 없게 되었다. 저번에야 어떻게든 이성으로 제어한 다음에 저 남자가 몸을 억눌러줘서, 그냥 조금 폭주했다고 바깥에 둘러대는 정도로 끝났다. 다만 이제부터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면 주위의 피해도 피해지만 첼 본인이 가장 짜증날 터였으므로.
행선지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행동은 전부 기사단에서 주시하고 있다고 예전에 들었다. 대륙을 넘어 이리아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는 여정쯤 되면 말하지 않아도 알반 기사단의 귀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이리아라……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왜."
"첼씨의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 느낌이 들어서요."
이쯤 되면 스토킹에 이어서 독심술인가? 첼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알반 엘베드의 조장 기사 톨비쉬는 일정을 도대체 어떻게 조정한 것인지, 마나 터널도 타지 않고 이리아를 탐험하는 첼에게 중간부터 동행했다. 내가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냐고도, 첼은 이제 그렇게는 묻지 않았다.
"혹시 당신 임무가 내 감시 아냐?"
"기사단 차원에서 첼씨의 소식을 듣는 게 감시라고 보신다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할지도요."
첼은 톨비쉬의 동행을 허락한다는 말은 물론 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그를 내버려두었을 뿐이었다. 첼이 이리아를 걷고 있는 사정을 모르는 놈이 감시하거나 따라붙느니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랐다. 저번에 목을 졸린 빚은 잊지 않고 있었지만.
"첼씨, 목적지를 여쭤봐도 될까요?"
"없어."
"설마 그냥 탐험이 하고 싶어서 돌아다니신다고 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저건 알면서 묻는 거다. 정확한 목적지는 없다. 대신 목표로 하는 것은 있다. 첼은 적당히 대답했다.
"탐험 취미가 없는 건 맞아. 그러니까 조용히 해."
켈라 베이스캠프부터 한참이나 와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아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다고 확신은 하고 있었다. 영혼을 좀먹는 균열을 만들었던 자가 아마도 이리아에서 그런 일을 도모했었을 테니.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울라 대륙에 존재하는 지식으로 해결법은 없으니 여기로 와야만 했다. 초원과 사막의 탐색은 끝났고 남은 곳은 피시스의 설원과 칼리다 너머의 화산 정도였다. 눈 위에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했다. 첼은 발레스를 그대로 지나쳤다.
"쉬지 않으셔도 되나요? 꽤 먼 길을 왔습니다만."
"나는 됐어. 당신은 발레스에 있던가."
"그럴 수는 없지요."
파르 유적 아래로 펼쳐진 광대한 설원 위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신의 힘을 퍼뜨린다. 인간의 몸으로 일시적인 신성이나마 손에 넣은 자를 한두 번 지켜본 것도 아니면서 톨비쉬의 파란 시선은 뚫어져라 첼을 보고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작은 소년이 광채의 날개를 달고 눈 위를 건넜다. 평소에 톨비쉬를 대하는 조금 신경질적인 얼굴이나, 특별조의 견습 기사들을 대할 때 보이는 장난스런 표정과도 달랐다. 어딘가 초조하고,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어려보이기까지 한다고 톨비쉬는 생각했다.
톨비쉬가 문서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에린에 온지 얼마 안 된 여행자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조막만한 손에 검을 들었던 작고 어린 여행자는 드루이드의 칭호를 손에 넣을 만한 노련한 영웅이자 반신이 되어 이곳에 있었다.
찾았다. 발레스와 파르 유적에서도 한참이나 먼 장소였다. 피시스의 땅은 그다지 매력적인 탐사 장소가 아니었다. 가혹한 날씨도 그렇고, 의미있는 유물이 그렇게 많이 발굴되지도 않은 탓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대륙의 끝에서 온 정신을 집중해서 첼은 영혼에게 이끌린 듯이 목표를 찾아냈다.
반장갑만 낀 손으로 눈더미를 파헤치는 첼 곁에서 방패를 내려놓은 톨비쉬가 두터운 건틀렛을 뻗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급했다. 대꾸할 틈도 없이 파헤쳐들어가자 첼의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새카만 무언가가 눈 위로 끌려나왔다. 톨비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이게, 대체……?"
달변인 남자가 말을 잃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끊어지기 직전처럼 보이는 녹슨 사슬로 칭칭 동여맨 까만 것이 첼의 손 위에 올라왔다. 구체 형태에서 모난 부분이 듬성듬성 뻗어나온 정체불명의 물건을 보며 톨비쉬가 숨을 삼켰다.
"이게 무엇인지 꼭 들어봐야 할 것 같군요."
"나도 몰라."
"모르는 것을 여기까지 무작정 찾아오셨단 말입니까?"
"그냥 이걸 꼭 찾아야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지고 돌아가서 생각해봐야지."
얼어붙은 사슬이 거추장스러웠다. 잡아 뜯는 것처럼 땅속에서 나온 물건을 가방에 집어넣고 첼이 일어난 순간 톨비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첼씨!"
"얌전히 묻혀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나보네."
땅에서 울림이 들린다. 톨비쉬에게는 마치 사도가 걸어오는 것처럼 들렸다. 첼에게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먼 예전, 저 세상에서 들었던 소리처럼 느껴져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신성력의 푸른 빛이 주변을 휘감았다. 동료를 지키는 방패라는 이름이 붙은 그 기술 안에서 첼은 태연하게 스태프를 들었다. 놀랄 이유는 없었다. 이계신의 사도라는 것들과도 질리도록 싸웠는데, 위험한 유물 좀 잘못 캐면 이럴 수도 있지.
첼은 사막의 망령이 덕지덕지 덩어리를 붙이고 나타난 듯한 물체들을 응시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등에 있던 스태프가 손으로 휙 넘어오고 마나가 약속된 형태로 치환된다. 신성력의 방패에 못지 않는 강렬한 빛이 공기중을 메우고 적을 쏘아 무너뜨렸다. 생각보다 튼튼한지 그정도 공격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는 하나, 둘, 범위를 가늠하며 첼이 허리춤에서 완드의 손잡이를 잡았다.
"시간은 제가 벌겠습니다."
방패를 든 자의 역할은 으레 그런 법이다. 톨비쉬가 가까이 온 적을 쳐냈다. 생물이 아닌지 칼에 맞자 그것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 더 기분 나빴다. 캐스팅이 끝난 첼은 몸 주위로 떠오른 붉은 기운을 모아 바닥으로 내리쳐 폭발시켰다. 톨비쉬는 충격에 대비해 방패로 자신과 첼을 감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닌가요?"
캐스팅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시 스태프를 잡으려던 첼은 기묘한 적을 그대로 후려쳐서 거리를 벌렸다. 톨비쉬가 걸어준 보호가 있으니 접근한다고 해서 그렇게 피해가 크진 않겠지만, 그래도 미지의 것과는 보통 닿지 않는 편이 낫다. 톨비쉬처럼 방패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이리저리 피하며 첼은 스태프에 손을 댔다.
다시 한번, 섬광을 쏘아올릴 준비를 하려다가, 그 드루이드는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마나가 몸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욕설을 하기 전에 첼은 가방 안에 거칠게 손을 집어넣어 듀얼건을 꺼내 엉망으로 조준도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불길한 예상대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탄환은 전혀 발사되지 않았다.
"뒤를 조심하세요!"
대검으로 톨비쉬가 적을 멀리 날리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몸에 아직 보호의 기운이 남아있으니 조금 스친 뒤에 윈드밀이든 뭐든 반격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첼은 시커먼 기운이 손을 뻗어온 순간 더욱 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첼을 지켜줄 방패는 없었다. 피를 토할 듯한 통증과 함께 첼은 앞으로 고꾸라지려다가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다가온 톨비쉬가 그 등을 지켰다.
"괜찮으신가요? 실드가 벌써 해제되다니, 제가 실수한 모양입니다."
"아냐."
입가에서 핏방울을 닦으며 첼은 무사히 일어났다. 차라리 톨비쉬 탓이면 실컷 원망이나 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뇌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주었다.
"다시 써봐."
"그래야죠. ……음?"
정신을 집중한 톨비쉬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눈치 빠른 남자답게 첼이 왜 이러는지 안 톨비쉬가 허탈하게 웃었다.
"과연, 이런 뜻이셨군요. 전혀 안 됩니까?"
"안 돼."
심지어 마나를 소모하는 듀얼건마저 움직이질 않는데 마법이고 신성 기술이고 될 리가 있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첼은 검을 꺼냈다. 톨비쉬는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검이라, 이 상황에선 그게 낫겠지요. 물리력은 통하긴 하니까요."
"이게 뭐라고 생각해?"
"묻혀있던 것을 둘러싼 사념일까요, 그보다 더 지독한 걸지도 모르죠. 혹시 아까 파낸 걸 버리면 멈출까요?"
"나는 아니라고 봐."
"그러니 싸우는 수밖예요. 그게 뭔지 몰라도 첼씨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분명 가치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중략)
보통 인간은 죽으면 그걸로 끝, 톨비쉬가 이렇게 강하지 않았더라면 첼은 지금쯤 다른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지키면서 싸워야 했을지도 몰랐다. 얼마만에 잡는지도 모를 검을 들고서, 먼 예전에 어떻게 싸워왔는지도 전부 잊어버린 채로.
첼은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했다. 톨비쉬라면 괜찮다. 어지간한 적은 절대로 저 남자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리고 밀레시안은 한번쯤 죽어도 부활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일이 틀어지면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그저 가방 안의 물건을 무사히 가지고 돌아가서 알아내고 싶었던 것을 밝힐 수 있다면 된다.
일전에 첼은 본 적이 있었다. 이 남자의 몸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로 흉터투성이고, 실제로 심한 상처를 입어놓고도 잘만 떠드는 걸 치료해주었다. 죽어도 부활하지 않는 몸이 쇠를 수십 수백 번 담금질한 것처럼 강인해진 채, 그 위로 상처와 흉터를 겹겹이 쌓아도 인간이란 살아있을 수 있다. 그런 몸을 직접 보고 난 후로 톨비쉬는 여기서 조금 다치든 저기서 더 다치든 전혀 죽을 일이 없어보인다고, 첼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곤란한 상황이어도 당신이 죽을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럼 좀 내버려두어도 되잖아.
(중략)
판단 자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 결과가 예상 외로 참혹했을뿐이었다.
"아……."
신성을 두른 몸으로 변화하려던 그 순간 생긴 틈이 움직였다. 첼이 계속 신경쓰고 있던 균열은 그런 곳에서도 커져가고 있었던 듯했다. 신의 힘을 몸에 두를 때에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신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은 보통 신뿐이므로.
차라리 아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신성마저 봉인당했으면 그쪽을 걱정했으련만 한 순간 첼의 빈틈을 파고들 수 있게 만든 지체가 문제였다. 신성을 펼치는 날개가 첼의 등에 둘러지기까지 아주 조금 늦었을 뿐이었다, 마력이 전혀 스태프나 완드에 모여들지 않았던 것처럼.
소리 없이 설원에 쓰러진 그림자에게 덤벼드는 것들을 첼은 평소에는 절대로 쓰지 않는 창을 휘둘러 모두 쳐냈다. 희게 빛나는 신성의 힘에게 거역하지 못하고 그것들은 그냥 무기로 쳤을 때보다는 쉽게 사라져갔다. 나머지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첼은 갑옷 위로 톨비쉬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걱정의 말보다 훨씬 먼저 튀어나온 쪽은 질책이었다.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일지도 몰랐다. 빈틈을 보인 순간 그냥 내가 찔렸더라면, 나는 그저 부활하면 되니까.
하지만 몇 번이고 생각해봤듯이 당신은 아냐, 아니라고!
첼이 보였던 틈새를 그 몸으로 막아낸 금발의 기사가 어찌어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이라니…… 말씀이 심하신걸요, 첼…… 씨."
"전부 처리하고 올 테니까 닥치고 있어."
보기 드물게 첼이 화가 난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톨비쉬는 의식이 흐려진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방패를 내던지고 몸으로 막아야할 만큼 급박했던 탓이었다. 사실 이것만큼 심하게 다친 적이야 전에 있긴 했지만, 마력도 신성력도 없이 점점 무거워지는 몸으로 싸웠던 탓인지 걸리는 부하가 남달랐다.
신을 죽이는 창을 든 반신이 그 지긋지긋하게 끔찍하고 귀찮은 것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검을 들고 고군분투 했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력을 쓸 수 없었다고 해서 이렇게나 번거로워질 줄이야.
물건을 찾느라 신성을 사용했던 탓에 다시 힘을 사용하는 것이 한참 늦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빨리 이 힘으로 적들을 정리한 뒤에 마나 터널을 타고 돌아갔으면 지루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겠지. 그 뒤에 그에게 시덥지 않은 소리나 들으며 헤어졌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돌아간 첼은 그제야 톨비쉬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철제 갑옷이 군데군데 부서지고 부식되어서 그 안은 어떤 부상이 자리 잡았을지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의식은 없는지 늘 쥐고 있던 검도 방패도 널브러진 채 설원 위에 누운 기사는 말이 없었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하얀 설원, 금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당신, 촛불처럼 꺼져가는 생명. 뒤에서 공격받고 꼴사납게 밀려났던 아까 전처럼 다급하게 첼은 눈 위를 달려갔다.
순간 그의 입술이 그런 말을 흘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합니다, 라고.
신의 힘으로 첼 자기 자신이야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력은 완드고 스태프고 모여들지 않았다. 가장 기초적인 힐링도 쓸 수 없다니, 드루이드의 체면이 없어도 정도가 있다. 응급치료도 물론 능숙하지만 여기서 할 순 없다. 눈을 감은 자의 뺨에 손을 갖다대자 한참 전에 얼어붙은 손과 별로 온도 차이가 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하다니, 대체 뭐가?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그런 말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해준 사람이 그 뒤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을지는 결코 들을 수 없었다. 밀레시안에게는 없는 것을 맞이하여 가버렸으니까.
왜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왜?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사실 네가 따라오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혼자서 처리했을 텐데? 굳이 이곳으로 오지 않아도 해결책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몇 번 죽어버려도 괜찮았는데? ……사실은 그 심연에 끌려들어가버려도 별다른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설사 영원한 잠에 든다 해도 돌아갈 곳이 있는 나는, 밀레시안이니까.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서 유한한 목숨을 가진 당신이 몸을 던지는 건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나를 희생시키려던 이는, 마지막에 미안하다고 말한 채 사라져버렸다.
"아, 아아……."
손이 떨려본 것은 얼마만의 일이었을까, 잇몸 사이로 참을 수 없는 비명 같은 울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얼어붙은 뺨을 따뜻한 물기가 적셨다. 뺨과 턱을 타고 흐를 만큼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일어…… 나라고! 빌어먹을!"
첼은 들어야만 했다. 어째서 이 기사가 매번 이렇게 행동하고 마는지, 정말로 미안하다고 말하였는지.
그 다음 말이 있다면 대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자기 몸보다 두 배는 커보이는 기사를 들쳐업은 채 첼은 마나 터널로 향했다. 추운 지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어디론가 이동해서 마력이 움직일 수 있게 돌아오는지부터 살펴야했다.
이리아 대륙에서 가장 쉬기 좋은 곳은 켈라 베이스 캠프겠지만, 수상쩍기 그지없는 물건을 가지고 베이스 캠프 같은 곳에 너무 가까이 가는 것도 곤란하다고 어떻게든 남아있는 일말의 이성이 방향을 잡아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첼은 칼리다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중략)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 죽게 둘 수 없다. 결심은 확고했고 첼은 그의 가방에서 나온 것인지 모를 붉은 포션병을 입으로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입에 한 모금밖에 되지 않는 포션을 머금고 첼이 손을 그의 얼굴에 가져갔다. 모닥불에게 나누어받은 것인지 이젠 그의 몸이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뺨을 눌러 살짝 잡아당기면 입술이 벌어진다. 잘 될지는 모르지만, 하고 첼은 고개를 숙여 입을 대었다. 허브의 성분이 농축된 포션은 하나 정도로는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사람이 이걸 목 안으로 어느 정도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가에 묻은 포션을 손등으로 문지른 뒤, 첼은 여전히 시야가 흐리다는 걸 깨달았다.
"하, 하하……."
한껏 갈라진 웃음소리가 허무하게 흘러나왔다. 설원에서부터 반쯤 이런 꼴인 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처럼, 첼은 웃었다.
나는 이제 설원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아.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가.
하지만 기억하고 있다. 잊을 수가 없다. 설원 위의 드루이드는 나와 함께한 시간을 넘어 내 목에 줄을 걸고 조였다. 그리고 설원 위의 한 기사가 나를 지켰다.
그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없었다.
"함…… 께…… 는 무슨."
나와 함께 있으면 당하는 건 십중팔구 이런 꼴이겠지. 기사단과 관련된 일이었다면 이렇게 된 것도 다 당신의 사정이라고 칠 수라도 있다. 그는 이번에 어디까지나 첼의 개인적인 일에 동행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따져들고 보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처럼 보인다.
"됐어…… 내 탓이라고 해도 되니까, 일단 그 말 많은 입이나 열어봐……."
넌 말이 너무 많아. 첼이 그에게 자주 하던 타박이었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정말로, 미안하다고 한…… 거면, 가만두지 않을……."
말은 없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에 끌려간 첼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심장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 안에 그의 감은 눈꺼풀이 비쳤다. 아직 뜨지 않은 눈.
그 끝없던 설원처럼 푸르고 맑은 눈동자가 보이게 되었을 때, 그는 첼의 입술에서 얼굴을 떼고 속삭였다.
"……어떻게 가만두지 않으실 건지 기대해도 될까요?"
조금 전까지 넋이 나가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환자여도 첼은 내팽개쳤을 터였다. 무어라 말하려다가 목에 덩어리가 걸린 첼이 켁켁거리며 기침을 했다.
다소 기운은 없어보이지만 그래도 멀쩡히 의식은 되찾은 톨비쉬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첼은 자신의 어깨를 감싼 근육투성이 팔을 쳐냈다. 오열 섞인 울음이 서서히 그쳤다.
"제기랄, 멀쩡하면 빨리 일어나라고!"
"아, 그쪽이 제일 문제였나요?"
"그럼 뭐가 문젠데."
"제가 첼씨에게 닿은 건 전혀 신경쓰시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확실하게, 가까이, 그건 의도적이다. 무의식중에 사람을 감싸안고 입을 맞출 수도는 있겠지. 하지만 이 남자가 말하는 태도를 보아할 때, 그리고 첼의 판단으로는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그정도는 상관없잖아."
"하긴, 그러니 아무 망설임 없이 포션을 먹여주셨겠지요. 감사합니다."
"일어날 수 있어?"
"글쎄요…… 완전히는 힘들지도."
톨비쉬는 상체를 일으킨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괴이한 부상으로 인해 피로감이 심했지만 첼의 처치가 옳았는지 후유증이 남을 듯한 느낌은 없었다. 전문적인 힐러에게 다시 치료받으면 어떻게든 낫긴 할 것이다.
기절해가던 때에는 어쩌면 다시는 눈뜨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기사로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간신히 눈을 떴더니, 눈을 감을 때 들었던 환청 비슷한 것처럼 누군가가 여전히 울고 있던 쪽이 드문 일이었다.
"저를 위해 울어주셨군요."
이제 설원의 냉기가 완전히 지워진 손으로 톨비쉬가 첼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물의 흔적이 아직 마르지 않은 뺨은 정말로, 그에게도 꽤 의외였다. 이 소년이 그를 어떤 의미로 신경쓰고 있다는 것까지는 톨비쉬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정도의 반응이 나올 줄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 그래. 울었다고! 사람 울린게 좋냐?"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분이셨다 싶어서요."
"당신 때문이잖아. 어차피 신의 힘으로 상처도 다 나을 텐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해서 날 귀찮게 만든 거야!"
"전과 같은 답을 드려야할 것 같군요. 제가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
비슷한 이야기였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밀레시안, 어차피 다쳐도 곧 나을 밀레시안. 지금 톨비쉬의 앞에 있는,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사람.
"그 때 무방비 상태로 당하셨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신의 힘으로 곧 나을 상처로 끝났을지, 아니면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나 사망한 첼씨가 부활하는 데에 지장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첼씨가 발굴해온 물건은 그만큼 수상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막았습니다."
평소의 그다운 논리를 펼치며 달변으로 돌아온 이 남자는 원래보다 움직임이 한참 둔하기는 해도 꽤 멀쩡해보였다. 첼이 영문도 모른 채 더 눈가를 젖은 채로 내버려두지는 않아도 될 터였다.
많이 진정된 첼은 마음에 걸리던 부분을 꺼내들었다.
"그럼 미안하다고 한 건 뭐야?"
"으음, 제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톨비쉬를 보며 첼은 이대로 그를 캠프 바깥으로 내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까지 그 난리를 치며 온 자기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진 덕분이었다.
"그렇게 말했다면 아마, 제 불찰에 대한 얘기겠죠. 저도 설마 이렇게 의식을 잃을 정도로 다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평소엔 실드에 둘러싸인 채로 싸우다보니, 실드가 없을 때의 제 방어력을 조금 과신한 게 잘못이었을 겁니다. 눈을 감을 때 아찔하더군요. 까딱하면 위험하겠다고."
"……."
톨비쉬의 눈에 비친 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불만은 있지만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소년의 얼굴에서 톨비쉬는 감정을 읽어보려고 했다. 안도, 회의, 후회, 아마도 그렇게 남겨진 것들을.
"첼씨의 그런 표정을 보니 안심이 되네요."
"안심 좋아하시네, 내가 여기까지 눈에 안 띄게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그렇게 우는 얼굴이셨으면 눈에 안 띄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알 수 없는 첼이 윽, 하고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았다. 그 찔리는 듯한 얼굴을 보며 톨비쉬가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살아있으면 됐다고 하셨을 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계셔서요. 게다가 첼씨가 우는 소리를 들었더니, 환청일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조금 전까지는 그럴 틈도 없던 첼이 크게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살아있으면 여전히 말만 많잖아…… 젠장, 괜히 급하게 살려놨어."
"제가 죽을까봐 두려우셨군요."
"그렇게 생각하든가."
첼은 부정할 기력도 없었다. 알터가 전에 말했었다. 신성 기술로 방패를 몸에 두르게 된 첼에게, 당신의 두려움은 주위 사람들을 잃는 것이라고. 알터에게 딱히 반박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 땐 그렇구나, 하고 넘겼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주위 사람이라는 게, 친한 사람이라거나 가족 따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이들 중 누군가를 뜻하는 거라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멋대로 내 앞에서 죽어버린 후로는 말이야.
눌리면 숨이 막힐 것처럼 큰 팔이 첼을 감쌌다. 한번은 첼의 목을 졸랐던 팔이었다. 덕분에 톨비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잘 들렸다.
"아직, 조금 더 울고 계시는 것 같네요."
"안 울어."
"저를 위해 울어주신다면 슬프고도 기쁠 겁니다. 첼씨를 서글프게 한 것이 가슴 아프고 첼씨가 저를 그만큼 생각해주신다는 게 행복하겠죠. 따뜻한 기분이네요."
(중략)
이 남자는 언제나 거부할 수 없는 결정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에게는 심장이 맞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제가 드린 말을, 첼씨가 어디까지 신뢰해주고 계신지는 모릅니다만."
"……."
"이제부터라도 이런 식으로 두려워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거나 죽지 않을 테니까요."
또다. 첼은 성역의 문이 열리던 날 일방적으로 받았던 약속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 때는 홀로 서있던 자리에 그가 곁으로 다가왔다. 마치 그 날부터 둘이었던 것처럼 톨비쉬는 사사건건 첼에게 왔고, 곁에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 정말로 곁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법석을 떨었던 걸 보면.
완전히 진정되었는지 첼은 헛웃음만 나오는 입을 다잡았다.
"안 그런다는 사람이 매번 그렇게 몸을 던져?"
"직업상의 문제죠. 첼씨를 지키고 싶은 제 마음도 있고요."
첼은 그 순간이야말로 톨비쉬를 쳐내고 일어났다. 눈물의 흔적도 거의 남지 않은 채 짜증이 담긴 표정에서 톨비쉬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것을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이 밀레시안 소년이 갖고 있는 생각을.
"대체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야!!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다난이 밀레시안을 지키고 싶어하는 게 이상하다곤 생각 안 해?"
"첼씨의 입장을 추측하면 이상하겠지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저와 같은 종족이 죽음을 초월한 종족을 지키려고 한다면요."
"대체 어쩌겠다는 건데?"
혼란스러워, 알고는 있어. 이런 접근이 무슨 의도인지, 당신이 나를 대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냐.
하지만 톨비쉬, 여전히 당신이란 사람을 모르겠다고, 첼은 생각했다.
당분간 붕대를 푸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완연히 부상자의 꼴을 한 채 톨비쉬는 푸른 눈에 진지한 빛을 띠고 답했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무시하고, 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게 되고, 무슨 말을 들어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게, 제가 당신을 대하는 마음입니다."
몸에서 또 맥이 빠진다.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첼은 주저앉았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다는 말 따위를 입에 담을 수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붉은 눈동자를 굴려 톨비쉬에게 향하자 그는 계속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방금 건 대답하시라고 드린 말이 아니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대답이 필요 없으면 그런 소리는 왜 하는 건데."
"아, 대답은 이미 받은 기분이 들어서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첼씨가 저를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 것만으르도 굉장히 즐겁습니다. 덧붙이자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하신 것도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는데요."
미안하다고 했으면, 이었지. 사실 그 말은 첼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린 이유와 아무 상관도 없었다고 밝혀져버린 참이었다. 그러니 더는 상관없었다. 첼은 거칠게 입을 열었다.
"저번부터 계속 말한 것 같은데 부상자는 입을 닥치고 쉬는 게 어때?"
"첼씨가 곁에서 계속 간호해주신다면 그렇게 하죠."
"이제 충분히 나았으니까 기사단에서 힐러든 뭐든 부르라고."
"이번 일과 부상은 제 개인 행동에 가까워서 딱히 그럴 수가 없는데요. 사실 기사단에도 첼씨만큼 뛰어난 힐러가 그리 많지는 않답니다. 보세요, 다 죽어가던 제가 이정도로 나아지고 있잖아요?"
방금 전에 힐링 걸어주지 말걸, 의미 없는 후회를 하며 첼은 이마를 꾹 눌렀다.
(중략)
"조사는 내 몫이야. 결과를 알려주는 것도 내 맘이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다쳤는데 쌀쌀맞으시네요."
"난 따라오라고 한 적 없어."
"덕택에 첼씨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됐으니 저는 이것도 꽤 괜찮은걸요."
아까부터 뭘 말해도 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된다. 힐링을 걸면서 상태를 지켜보느라 그의 옆에 앉아있던 첼에게 톨비쉬가 몸의 무게를 맡겼다.
"무거워."
"죄송합니다, 벽보다는 이쪽에 기대고 싶거든요."
"사과받고 싶지도 않아…… 이제 안 아파?"
"첼씨 덕분에."
"몸 멀쩡하면 다시 잠이나 자."
"잠이 오질 않는데요."
"나한테 자장가라도 불러달라고 할 셈이야?"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요."
첼은 등에 실린 무게를 그대로 쓰러지게 둘까 싶었다.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딱히 좋은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미안하다고 한 거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라고 하셨던 게 맞죠?"
아니라고 해봤자 추궁당할 것 같아서 첼은 가만히 있었다. 울면서 그렇게 말했던 자기 자신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제 판단 착오에 대한 말이었죠. 어쩌면 제가 뛰어들어야할 곳을 가리지 못하고 첼씨 앞에 몸을 던졌던 걸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첼씨가 저를 가만두지 않으시겠다고 생각하셨다기엔…… 조금 이상해서요."
"세상엔 원래 이상한 일이 많아."
"이런, 인정하시는 겁니까?"
"맘대로 생각하라고. 어차피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매번 그러잖아."
"그러도록 하죠. 자, 그럼 대체 첼씨는 무엇 때문에 저를 가만히 두지 않고 싶어하셨던 걸까요? 제가 첼씨를 지킨 게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면 저를 두고 캠프를 나가셔도 될 텐데 아직 여기 계시고,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설명을 요구하셔서 해드렸으니 해결이 된 것처럼 보였죠."
상황을 되짚어나가는 톨비쉬를 막을 재간이 없는 것은 첼이 오늘 당황했던 나머지 너무 많은 밑천을 보여주어서였다. 보는 앞에서 펑펑 울고 있던 것부터가 틀렸겠지. 첼은 점점 포기하고 있었다.
"신경 쓰이는 점이 조금 전에 하나 더 생겼는데, 이렇게 연결하면 될 것 같군요. 제가 이렇게 대놓고 첼씨를 귀찮게 하고 있는데도 사과는 받고 싶지 않으시다고."
"그래."
"그건 제가 폐를 끼쳐도 감사를 할지언정 사과는 드리면 안 된다는 뜻일까요?"
"감사도 별로인데……."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지 모르겠군요. 감사도 사과도 안 되면 무엇으로 제 마음을 보여드려야 할까요."
톨비쉬가 숨을 쉬는 것이 온 몸으로 전해졌다. 그 거대한 몸이 기대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몸이 약간 찌그러뜨려진 듯한 감각인 채 첼은 듣고 있었다.
"가만 안 두신다고 할 만큼 첼씨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의 말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취미야?"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는 알겠지만, 쉽게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부디 봐주세요."
"말하는 것부터 별로라고 했잖아."
"하하, 저는 매번 첼씨에 대해 이런 식으로 알아가는 것 같군요."
"나는 당신이 매번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던데."
"그래서 말씀드렸지요, 매번."
그걸론 역시 모르겠단 거야, 오래 살아온 밀레시안에겐 그런 밀레시안에 대한 취급이 아닌 쪽이 더 생소하고 곤란할 때가 있다는 것을 첼은 끈질긴 톨비쉬를 보면서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첼씨를 가만두고 싶지 않은 건 제 쪽일 텐데 말입니다."
"……뭐?"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귀에 들어오지 않아 한 박자 늦게 반문한 첼에게 지금은 허브 냄새가 날 듯한 건장한 몸이 겹쳐졌다. 모닥불의 빛에 그림자가 지워진 얼굴 아래에서 첼은 눈을 깜빡였다. 한가득 시야에 들어오는, 죽지 않았으면 했던 사람의 얼굴.
"사실 전부터 느끼던 겁니다만,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으셔서요."
"당신은 말이 너무 많다고 했잖아."
"하지만 저 말고는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진 않으시죠."
정말로 늘상 감시를 당하고 있던 게 아닐까, 첼은 그렇게 생각하며 톨비쉬의 어깨를 잡아밀었다. 조금 힘싸움이 되었고 그를 밀어버릴 수는 없었다. 톨비쉬가 조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첼씨가 아직 부상자인 저를 진심으로 내던지실 분은 아니겠죠."
"지금 당장 진심이 되고 싶은데."
"저도 진심입니다."
닿는 정도가 아니라, 입술이 안까지 깊게 파고들었다. 그의 어깨를 잡았던 팔의 손목을 톨비쉬가 감싸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첼은 눈을 감았다. 닿는 감촉이 흐르는 피처럼 뜨겁게 입술을 데웠다.
딱히 받기만 하지 않고 꽤 적극적으로 첼이 반응하자 톨비쉬의 얼굴에 의외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거부하시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요."
"하고 싶으면 딱히 막진 않아. 좀 전까지 아파서 죽어가더니 엄살이었어?"
"이게 다 첼씨의 회복 마법이 훌륭해서죠."
한 사람은 아래에, 한 사람은 위에, 서로의 몸을 맞대고 붙잡은 채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본다. 전하는 말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제 진심은 어떠셨나요?"
"그래서 그게 뭔데?"
당신이 내면에 있는 것을 털어놓지 않듯이, 저도 말해드리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었답니다. 심술을 부린다는 의미 말고는 딱히 의미가 없을 테니 관두었지만요.
톨비쉬는 진심을 입에 담았다.
"깨어나달라고 바라시던 제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서, 첼씨를 보고 있다는 증명이지요."
그와 힘겨루기를 할 듯이 팔에 힘을 주고 있던 첼이 기운을 뺐다. 호리호리해보이는 소년의 팔이 기사의 단련된 손 안에서 늘어지고, 증명을 말하는 기사를 바라보며 첼은 전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나아."
영원히 듣지 못할 뒷말을, 의도를, 의사를 추측하고 추론하고 부풀리고 쪼그라트리며 잠들지 못한 채 머릿속을 괴롭히는 날들보다 이렇게 확실한 말 한 마디가 전해진 것이, 설령 진심 뒤에 숨겨진 칼날이 있더라도 지금만큼은 괜찮다고.
모닥불 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는 첼에게 다음 입맞춤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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