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님의 밀레시안 첼을 빌려왔습니다.
환자가 없는 침상은 좋은 휴식처였다. 잠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첼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표정을 바꾸며 부스스 일어났다. 근처에 무슨 일이 있나, 어차피 이 안까지 무슨 일이 생길 정도면 나를 부르러 오겠지만.
"첼님! 첼님! 여기 계세요?"
여기 없다고 하기 전에 대뜸 쳐들어온 알터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첼을 쳐다보았다. 아발론 게이트 가운데에 석상처럼 서있어야할 알터가 움직였으면 보통 일은 아닐 터였다. 첼이 침상에서 더 빨리 일어나는 것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다.
"응?"
"스카하 수원지쪽에 제바흐가!"
알터는 다행히도 그리 횡설수설하지 않았다. 잔존한 제바흐가 나타나 정찰 캠프를 덮치기 직전인 것을 알반 기사단이 막고 있지만 힘이 부치나 보았다. 이미 벨테인의 견습기사들은 전부 지원을 위해 뛰어나갔고 아벨린과 알터는 언제나 그렇듯이 문 안을 경계하느라 이곳을 나갈 수는 없는 듯했다. 알터는 어지간히 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벨린이 허락하지 않았겠지. 마침 밀레시안이 여기 있었으니 참 형편이 좋았다.
"어디라고? 아니다."
제바흐의 덩치과 기척이면 아발론 게이트를 나가기만 해도 눈에 띌 것이다. 덜 떠졌던 눈을 당긴 뒤 문 바깥으로 나가자 기분 나쁜 죽음의 그림자가 평소보다 더 짙었다. 마녀가 사는 동굴의 근처는 원래도 그리 기분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조용하기라도 했었다. 오늘은 아마 그 사도를 죽일 때까지 조용해질 수 없을 터였다. 벨바스트 근처이니 오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처리하려고 기사단이 몸을 던지고 있겠지.
그 때까지는, 막연하게 기사단이라고만 생각했다. 도와주러 나간 것도 그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견습 기사들이 다쳐서 돌아오면 그냥 싸우는 것보다 더 귀찮은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치료해주는 것도 그 다음에 다시 뭐라고 시키는 것도 아주 번거로우니까 말이지.
알터가 하도 다급한 얼굴이라서 전력이 모자라는 그런 상황이라고 무심코 생각했었는데, 하고 밀레시안은 멈춰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어. 첼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시체들을 처리하는 견습 기사들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가장 비참하게 시체를 유린당한 거대한 결과물이 그 가운데에서 쓰러져 꺼져가는 비명을 흘리고, 거대한 검을 든 성기사가 사도의 몸통에서 검을 뽑았다. 강철의 색을 띤 갑옷에 튄 것은 사도의 피인가, 그렇겠지.
"아, 첼씨. 오실 줄 몰랐는데 조금 늦으셨군요. 전투는 이제 막 끝났습니다."
"그래?"
첼이 삐딱하게 대답하자 금발의 성기사는 방금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제바흐의 몸뚱아리 위에서 내려왔다. 약한 것들 정도는 견습 기사들로도 무리가 없는지 정말로 상황은 끝난 참이었다. 사실 저기 서 있는 게 누구였어도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첼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알반 엘베드의 조장 톨비쉬는 제바흐 하나 정도 날뛴다고 죽을 인간이 아니었다.
"조장님, 보고드려도 될까요?"
"이건 내가 준 임무도 아닌데."
"일단은 오셨으니까요. 조장님과 함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은데 아쉽네요."
로간이 무기를 집어넣으며 다가오자 첼은 됐다고 했다. 딱히 다친 기사도 없는 것 같았고, 견습 기사들이 규정에 따라 잔해들을 정리하는 걸 지켜볼 이유는 딱히 없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상황이 끝났으면 아발론으로 돌아갈 이유도 없어서 그냥 벨바스트로 가든가 근처의 문게이트를 밟아버릴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시는 겁니까?"
"상황 끝났다며, 가야지."
"좀 여쭤보고 싶은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중요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해."
아, 또 시작이군. 카오르는 잔해를 소각할 불을 피우며 그 대화를 흘려들었다. 그들의 조장님은 언제나 저 기사가 나타나면 말이 짧아졌다. 평소에는 차라리 아발론 게이트를 쏘다니면서 기사들을 놀릴지언정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톨비쉬님이 기분 상하게 하는 일이라도 하신 건지.'
물론 견습 기사들이 아는 톨비쉬는 어지간해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견습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카오르는 그렇게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첼은 톨비쉬가 다가오기 전에 정말 가버릴 생각이었다. 아마 상황이 끝나기 전에 도착했어도 별로 열심히 도와줬을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제바흐는 톨비쉬에게 맡겨두고 적당히 견습 기사들이나 지켜봤겠지.
"첼씨."
뒤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로간의 목소리가 그렇게 절박했더라도.
"톨비쉬님!!"
"어이, 조장! 잠깐만 와봐!"
디이가 부르고 눈에 보이는 카오르마저 당황한 기색이 있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피에 물든 강철 덩어리가 서서히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쓰러졌던 육중한 제바흐처럼, 쿵하는 소리를 내고서.
"톨비쉬님, 괜찮으세요?"
"이거 빨리 옮겨서 치료해야겠는데."
"톨비쉬님을 모시고 아발론 게이트로 일단 돌아가는 게 어떨까."
"제바흐의 잔해도 얼른 처리해야하는데 한두 명이 빠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음,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믿을 것 같군요."
힘없는 웃음을 띤 얼굴이 로간의 어깨에 반쯤 팔을 걸치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 덩치에 갑옷을 갖춰입은 사람을 부축해서 데리고 돌아가는 것은 로간이나 디이 정도 되지 않으면 무리였다.
"일단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지만…… 내상인가? 어딘가 둔한 게 영."
"로간, 디이, 카오르."
성큼성큼 걸어온 첼이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너넨 하던 대로 전부 정리하고 돌아와."
"톨비쉬님은……?"
뭔지 모를 것으로 더럽혀진 건틀릿을 확 잡아 끈 첼은 로간에게서 빼앗듯이 톨비쉬의 팔을 잡아 둘렀다. 키 차이가 꽤 나서 겉보기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겉보기 체구와는 다른 힘을 지닌 밀레시안이니 부축하는 데에 별 무리는 없었다. 어딘가를 건드리긴 했는지 톨비쉬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가 펴졌다. 얼굴에서 고통을 참는 흔적이 역력했다. 별다른 말 없이 톨비쉬를 잡아끈 첼이 전투지에서 점점 멀어졌다. 아발론 게이트는 입구 지점을 통과해도 꽤 많이 걸어야했다. 부축받는 것이 아니라 질질 끌려가듯이 걷던 톨비쉬는 아픈 주제에 약간 재밌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첼씨가 손수 절 부축해주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부상자는 조용히 하고 있어."
평소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굴더니 오늘만은 그 뒤집어쓴 피가 적의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고, 첼은 머리에 스치는 생각을 억눌렀다. 제바흐를 완벽하게 쓰러뜨렸다고 다치지 말았다는 법은 없지, 아무렴.
알터와 아벨린에게 얘기해줄 생각도 없이 첼은 톨비쉬를 질질 끌고 치료소로 갔다. 슈안이 안경 너머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것도 싹 무시한 채였다. 이러는 첼을 보는 게 톨비쉬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표현하자면 홀로 기묘했다. 본의 아니게 그 밀레시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톨비쉬는 당연히 첼을 둘러싼 여러 관계를 알고 있었다. 어느 마을의 사람이라든가, 왕국의 여왕님, 친밀한 다른 밀레시안, 임무를 쭉 함께했던 알터나 아벨린, 최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견습 기사들, 그리고 톨비쉬 자신.
"걸을 수 있다고 하면 도와주시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도와달라고 먼저 부탁했어도 아마 혼자 걸으라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평소 첼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그렇게 판단했던 톨비쉬는 자신이 틀렸음을 알았다. 딱히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많은 이를 도와주는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 톨비쉬에게 그런 손길을 내밀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와줄 필요가 없을 만큼 톨비쉬가 강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안 도와줬으면 했어?"
"아뇨, 감사하고 있습니다. 견습 기사들은 꽤 지쳤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데려다주셨으니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톨비쉬가 갑옷의 고정된 부분을 풀어내는 사이 첼은 빈 침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톨비쉬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꽤 한참이나 갑옷을 전부 바닥에 풀어놓았을 때까지도 첼은 그 자리에 있었다.
"돌아가시지 않는 건가요?"
"내가 왜?"
"딱히 저와 단둘이 있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좋지는 않아."
"싫어하신다는 뜻도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마지막 쇳조각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크게 숨을 토해내며 자기 자신을 내려다본 톨비쉬는 예상보다 엉망인 것에 스스로 감탄했다. 그나마 매일 갖춰입는 갑옷 덕분에 이정도로 끝났겠지, 지켜보던 첼도 그렇게 생각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싫어하는데?"
"그럼 돌아가시지 않은 게 신기하군요."
"너 때문이잖아."
그 몸의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를 피에 물든 옷은 당장 처분해도 될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단추를 풀던 톨비쉬가 그 말에 잠깐 멈추고 첼을 돌아보았다.
"제가 걱정되서 계신다는 뜻이면 참 기쁘겠는데요."
"환자가 입만 살았네 진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벗으라고."
톨비쉬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가 알던 평소의 첼이 톨비쉬가 손끝이 닿는 것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탓이었다.
"여기 지금 힐링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 없잖아. 꾸물대지 말고 빨리."
"직접 치료해주신다니 영광이라고 하면 될까요?"
한 마디 더 하면 첼이 벌떡 일어날 것 같아 톨비쉬는 얌전히 고통이 찾아오는 곳을 기억하며 옷을 벗었다. 갑옷과 의복에 겹겹이 가려져있던 탄탄한 상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첼의 눈에는 오늘 생긴 상처만이 아니라 온갖 것들이 보였다. 검상, 찰과상, 마법 따위에 의한 화상, 부식된 흔적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흉터가 거기에 있는 듯했다. 거기다가 갑옷 위로 받은 충격에 의해 새로 생긴 피멍이나 터진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어쩐지 부축을 해줘야 걷더라니.'
대충 힐링이나 걸어주고 말 생각이었던 첼은 혀를 차며 일어났다. 등 뒤를 볼 수 없는 톨비쉬도 갑옷을 벗고 나니 그쪽이 문제라고 알아차렸다.
"음…… 어느 정도인가요?"
"여기까지 혼자 걸어왔으면 딱 쓰러져 죽을 정도네."
"하하,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혼자 응급처치를 할 생각이었던 톨비쉬에게도 꽤 곤란한 상황이었다. 고통은 쭉 뇌에게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호소하고 있었지만 보이질 않으니 손이 닿아도 제대로 된 치료가 어려웠다. 톨비쉬가 고민하기도 전에 또 성큼성큼 다가온 첼이 팔을 위로 뻗어 톨비쉬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앉아."
"힐링은 조금 미뤄도."
"다쳐도 말이 많은 건 똑같네. 두 번 말 안 해."
톨비쉬가 침대에 앉자 하얀 시트가 조금씩 너저분해졌다. 첼은 그 등 뒤로 돌아가 자신도 앉았다. 손가락을 들어 유난히 핏줄이 터진 부분을 꾹 누르자 톨비쉬가 입을 꾹 다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 강철 같은 기사도 상처가 나고 아프기는 한 모양이었다.
어디가 아픈지 확인한다는 말도 없이 첼이 묵묵히 여기 저기 상처를 만지고 있자 톨비쉬는 입을 꾹 다물고 인내하고 있었다. 무언가 천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톨비쉬가 시선을 살짝 돌리니 입으로 붕대를 찢는 첼이 있었다.
"뒤돌아보지마, 치료하기 힘드니까."
회복에 좋은 약과 소독약을 들이붓다시피 하자 자연스럽게 톨비쉬는 다시 말이 없어졌고 첼은 치료에 집중했다. 자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이정도 솜씨는 있었다. 단신으로 제바흐를 처리하고 이정도면 솔직히 들것에 실려오지 않는 사람이 대단했다. 뼈가 부러질 뻔 했고 내상이 약간 있는 것 같지만 응급처치 후에 힐링을 하면 해결될 수준이어서 첼은 이거라도 마시고 있으라고 포션을 던져준 뒤 구석구석 약을 발랐다. 가끔 세게 누르면 톨비쉬가 움찔거리는 것이 신기했다.
조금 전 적당한 크기로 찢어둔 붕대를 칭칭 감는 데에는 꽤 노력이 필요했다. 외견상 나이가 많지 않은 밀레시안의 체구로 그 커다란 기사에게 붕대를 감으려니 팔길이가 약간 모자란 기분이 들어 분해진 첼은 붕대 끝을 세게 당겼다. 좀 살만해졌는지 톨비쉬가 너스레를 떨었다.
"저에게 뭔가 불만이 있으시다면 말로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싫어."
절대로 풀리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숨막혀 죽으라는 건지 모르게 붕대 매듭을 꽉꽉 매는 첼의 손을 보며 톨비쉬는 자신과 단둘이 있는 건 싫다는 이 밀레시안이 치료는 정성껏 해주고 있는 상황에 대해 타당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내버려두어도 당장 죽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고 스스로도 생각했고 첼도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힐링 완드를 다시 손에 쥐려던 첼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치료해야할 상처와 이미 먼 옛날에 치료되었을 흉터들이 머릿속에 교차했다. 그 모든 상처들에 고였던 피과 고통이 무수한 흉터를 만들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고통은 있지만 흉터는 없다.
"첼씨?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냐. 그냥 가만히 있어봐. 다 됐다고 할 때까지."
이렇게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 인간이 살아있다. 한 번 죽어버리면 돌아올 수 없는 몸뚱아리를 가진 채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고통은 얼마나 강대한지, 영혼이 육신을 떠나도 곧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존재는 어렴풋이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가장 앞에 서는 자가 피를 흘린다. 늘 그랬던 밀레시안은 피와 고통은 기억해도 흉터는 기억하지 못했다. 곧 사라져버리는 형체없는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거리가 멀었으니까.
아직 불완전한 낙원의 방패가 되는 이 성기사는 피를 뒤집어 썼다. 적의 피도 스스로의 피도, 예외는 없다. 가엾은 시체의 몸에서 뽑혀나왔던 검만큼이나 피를 뒤집어 쓴 채 대지에 뿌리를 박은 방패처럼 서있다. 때로는 뒤를 지켜줄 이도 없이, 돌아올 수 없는 생명을 홀로 흘리면서.
"첼씨……?"
이번에는 조용히 하라는 말이 날아오지 않았다. 치료하는 억센 손길이 아니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온기가 붕대 위로 닿은 것을 느끼고 톨비쉬는 움직이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그저 듣고 싶었다.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숨소리는 훨씬 가까웠다. 귀를 댄 곳에서 차분하게 들숨과 날숨이 만드는 호흡이 다가왔다. 첼은 잠시 눈을 감았다. 붕대로 가려진 흉터가 보인다.
"……살아있네."
"죽은 사람을 치료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고도 잘도 살아있다는 뜻이었어."
밀레시안이 할 말은 아니지만, 보통 인간은 그 정도로 다치면 죽거나 그만두니까. 첼은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고 갑옷을 벗은 몸을 보여준 톨비쉬는 이해하고 있었다.
"살아있으니까 됐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영문을 모를 말을 던진 채 첼은 몸을 들어 조용히 힐링 완드를 손에 쥐었다. 마나의 흐름에 의해 몸이 조금씩 상쾌해지는 것을 느끼며 톨비쉬는 아까 첼이 시켰던 대로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할 것이 있었다.
이 밀레시안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첼씨."
"아직 안 끝났는데."
"다름이 아니라, 제 상태가 제가 살아있는지 생각하셔야할 정도였나 해서 말입니다."
"그랬지. 원래 있던 건지 새로 다친 건지 모를 상처 투성이에 피는 줄줄 흐르고 아주 엉망진창이었어."
"그렇다고 해도 상처 자체에 충격 받으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왜, 이상해?"
첼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톨비쉬는 그게 대답하기를 거절하는 것으로 듣지 않았다.
"제가 아는 한 훨씬 심한 부상도 당하셨던 적이 있으시니까요. 저는 충분히 이정도면 살아있는 상태 같았거든요."
말을 유도해내고 있는 거겠지. 첼은 알면서도 대답해주기로 했다.
"그래, 아주 잘 살아있지. 근데 그러다 죽는 수가 있거든."
"제가 말인가요?"
"나는 죽음의 감각은 알지만 죽어도 살아나지 못하는 삶은 몰라."
"과연, 그런 거군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한정된 생명을 흘리는 기사는 이 세계가 존재하는 한 생명을 약속받은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힐링이 끝났는지 더 이상의 잔소리는 없었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그러다 죽으면 나는 모르는 일이야."
"걱정해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터진 상처에서 나온 피로 물들어 반쯤 넝마가 된 옷이라도 입은 톨비쉬가 잠시 쉬고 돌아가겠다며 침대에 누웠다. 모든 것에 앞서는 희생을 붉은 자국이 대리하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처럼 사도를 쓰러뜨리는 것도 그렇고, 나와 함께 싸울 때도 그렇게 온몸을 던져서 피 흘리고 있었지.
언제 죽어버릴지 모르는 자가 함께 해준다고 약속하여도 신뢰할 수 있는지, 영원을 약속받은 자는 마치 순리처럼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내 피는 나에게는 무한한 것이나 다름 없어서, 나누어주었을 뿐이니까.
아마 당신이 내 곁에서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함께 해준다고 해도, 조금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을 위해 흘린 핏자국을 끌어안은 성기사는 피로에 지쳐 잠이 들고, 그 인간들의 안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아주 다른 인간은 졸리지도 않은데 누워서 눈을 감았다.
힐링으로는 채 닳지도 않은 마나를 원망하며 첼은 차라리 사도와 싸우고 피곤해지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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