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시련은 필연이리니
살을 가르고 뼈를 찢는 통증이 몸을 관통한다. 몸에 두른 것은 강건한 갑옷이 아니라 소박한 의복이며, 발에는 강철로 벼린 신발이 없다. 느끼는 아픔의 크기를 증명하는 핏자국에 바닥에 길게 새겨졌다. 가시덩굴을 밟아넘기며 걷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나의 신이시여.'
회한의 동굴은 기사가 되려는 인간을 시험하여 신성 기술의 발현을 돕는다. 만약 회한의 동굴에서 무언가를 얻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무슨 일이 생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은 큰일이 나더라도 누군가가 구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기도 한 덕분이었다.
피네는 지금 완연히 혼자였다. 회한의 동굴과 비슷한 상태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알반 기사단의 훈련소 같은 곳인가 했다가, 이내 양쪽 모두임을 깨달았다.
당하기 전까지는 무엇인지 모를 심문이었다. 아마 받는 이를 가사 상태에 빠뜨려 그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려는 과정인듯 했다. 회한의 동굴 속에서 나락까지 떨어진 기분 같기도, 훈련소에서 벼랑 긑까지 내몰린 듯한 감각이기도 했다.
발에 박힌 가시는 진짜가 아니다. 알고 있는데도. 고통은 현실이었다. 한 발짝 내디딜 떄마다 몸을 에워싸는 한기도 납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팔도 모두 그녀의 마음을 한꺼풀씩 벗겨내어 밑바닥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주신을 향한 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데에는 이 방법밖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배를 가르고 심장을 뽑아 마음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인간이 마련한 수단으로 신앙을 보여야만 한다.
'그대에게 주신의 검으로서의 신실한 의지가 굳건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누가 판단하는가. 이 고통이? 그녀가 내놓을 결과를 기다릴 심문자들이? 기도에 응답해주실지 알 수 없는 절대자께서?
피네는 심문을 준비하면서 아튼 시미니께서 자신을 내칠 거라 생각한 적은 사실 없었다. 신보다 아래인 인간에게 심문받을 기회를 주셨으니 신께서는 나를 긍정하신 거라 넘겨짚으면서.
신의 기사로서 외람된 말이오나, 사실 당신께서는 제 기도에 답해주신 적은 없으시나이다.
고통에 새겨넣을 첫 번째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기도하고 있었다.
'주신께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것은 지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늘 그랬지요, 제가 울음을 토하고 숨을 쉬기 시작한 날부터, 아니 저뿐만도 아닐 겁니다. 미완성의 세계에 태어나 살아가는 자 모두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른 채 나름의 고통을 키우며 걷습니다. 한번 박힌 가시가 쉽게 빠지지 않듯이 저는 잊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늘어가는 가시의 수만큼 자랐습니다.
피네의 삶은 늘 시험 속에 있었다. 병마와의 싸움도 선지자의 유혹도 선택의 순간도 고난의 수련도 앞에 서게 된 자의 결단도 목숨의 갈 곳을 결정하는 자리도 돌아온 곳도.
그에게 괜찮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으랴, 사도의 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구해달라고 외치기만 하던 얼마 전보다는 상황이 백 배 나았다. 적어도 자신의 다리로 걷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며, 이를 악물 수 있는 여지라도 있으니.
저는 당신께 부끄러울 만한 일을 한 종입니까?
사실 신께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그저 계신다. 피네가 진정으로 모르는 일이라면 그분도 말씀하시지 않는다. 허나 때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이들이 성토하곤 했다. 자격을 시험하고 신뢰할 가치를 증명하라며.
'……카즈윈이라면.'
무엇이 카즈윈을 피네와 같은 길로 이끌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카즈윈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증명을 마치고 돌아왔을 것만 같았다.
기사 견습생들은 생각보다 긴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는 이들이었다. 종종 듣곤 했었다. 카즈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정말 기사가 될 생각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말들. 피네는 그럴 때마다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웃으며 넘겼었다.
잘 모르겠는 것은 카즈윈이 아니라 그 말들쪽이었다. 그가 다른 이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고 해서 카즈윈은 그들이 말하는 기사가 될 수 없는 인물이 아니라고, 피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왜냐하면 피네 자신이, 속과 조금 다른 것을 말하며 겉에는 위장을 둘렀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나 같은 태도인 카즈윈이 훨씬 신께 가깝지 않은가 하고,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아튼 시미니께서 보시는 것이 다르지 않을 듯한 그야말로, 피네는 남몰래 생각했었다.
진짜로 신의 기사가 되고 싶었냐고 누가 묻었더라면 그렇다고 대답했겠지만 정말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피네는 그저 살고 싶어했던 어린 소녀였다. 꼭 기사가 되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도 힘내면 좋겠다고 입으로는 말하더라도 진심은 어디에 있었을까. 말했던 것들이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겠지만 순수한 진심을 입에 담아보았던 적은 너무도 멀었다. 그녀가 신의 기사가 될 수 있었던 큰 이유가 있다면 그 진심을 오직 그녀의 신께만 드러내보였다는 점일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모두 위장된 모습을 보이더라도 신 앞에서 그녀만큼 정직한 인간이 따로 있었을까.
'오직 당신께만.'
그 날 후부터 저를 아시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었습니다. 쭉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그렇게 매달렸기에 당신의 종으로서 저를 앞에 세우셨으리라 판단했습니다. 이토록 더럽혀져 신성기술조차 다른 기사들보다 불완전한 자를 곁에서 내치지 않으심은 분명 그리하다고 믿었습니다. 제 매달림을 저버리지 않으심은 언제나 제 죄를 알고도 제 삶을 허락하심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내 오만마저 알고 계셨으리라.'
가까운 곳에 이미 아는 자가 있을진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숨기려고만 했던 것은 어린 날의 치기와 비슷한 오판이었겠지요. 제가 새로운 시험에 마주한 순간부터 다시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홀로 해결하려고 한 오만의 벌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일지니.
몸을 깎으며 살아있기를 원하던 육신의 고통은 누구보다도 익숙했다. 병마와 싸우며 지지 않았던 정신도 건재했다. 시작된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피의 길은 더 이어지지 않을 만큼 상처가 후벼져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아온 죄를 모두 묶어 늘어뜨린 듯이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사고는 혼탁해지는 가운데 껍질이 벗겨지고 나면 진실만이 남을 것이다.
제 진실은 오직 그분께서 지니고 계시나이다.
시험하는 자는 인간이며 그 인간들의 신이고 나의 신이며 나이다.
그 모든 것에게 인정받는 길이 만약 없다고 해도 향할 방향은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각오는 되어있었다.
시험에는 언제나 다음 시험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의 신께서 이끄는 곳으로, 내가 밟아야할 장소로.
'……카즈윈.'
그도, 그러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추측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시험도 고통도 타인은 결코 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이 수면 위의 그림자처럼, 아무리 벗겨내어도 타인은 가장 깊숙한 곳을 볼 수 없다. 시험하는 자들은 가시에 찢긴 피부를, 육신의 고통에 굴하지 않는 태도를, 신에 대한 마음을 맹세하는 혀를,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는 절대자께서 내버려두는 종을 보고 그녀의 진실을 판단하리라. 신의 기사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한 피네는 언제든지 그럴 수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진실을 보여주려고 했던 적은 결코 없는데도, 그는 피네의 진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신께서 저를 용서하시는지 사실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저를 심문하는 분들이 이제 저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당신께 내쳐진 걸지도 모릅니다. 그저 제가 당신을 버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간청하겠지요, 이 땅 위에서 죽지 못해 살아갈 제가 신의 은혜를 바라겠지요.
그녀는 신을 버리지 못했다. 그 날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신이 그녀를 버리지 않았는지는 영원히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알 수 없으며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알지 못한다면 버림받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원래 그런 거잖아.'
불손하기 짝이 없어도 그런 사실이 그녀의 신앙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카즈윈이라면 이런 나도 긍정해줄까, 괜찮다고 말하며 받아들여줄까.
……아니다, 그는 이미 이런 나를 알고 있을 것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주었다.
'주신의 검으로서 부끄러운 사실이 있다면 저를 알아주는 이에게 한 마디도 털어놓지 않아 상황을 악화시킬 뻔했다는 점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는 발끝에 감각이 없다. 눈이 감겨 앞이 보이지 않는지 바닥에 쓰러져 얼굴을 처박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피네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 치……."
이외에 제가 당신의 종으로서 마땅히 겪어야할 수치가 있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나이다. 그 뒤에는 부디 다시 기사로 이 땅에, 그것밖에 살아갈 방법을 모르는 가련한 종을 세워주시옵소서.
신의 앞에 알몸을 드러내는 것은 전혀 부끄럽지 않을 터다. 그에게 부끄러움을 말할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절대자께서 내리는 수치는 영원히 새겨질 것을 알 수 있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인간에게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 달아나고 싶어지고 만다.
나는 이제 도망치고 싶지 않아, 카즈윈.
"아튼…… 시미니…… 시여."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심문을 위해 준비된 신성력이 무너져 사라지는 소리인지도 모른 채 피네는 정신이 나갔는지 돌아왔는지 자기 상태를 모를 정도로 혼미했다. 끝났다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카즈윈이 있던 덕분이었다.
"피네."
"주신께…… 이 몸을 낱낱이 드러내고…… 고할 것을 전부……."
"끝났어, 더 말하지 마."
반 가사상태에 빠져있던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정신의 막이 벗겨진 상태에서 온갖 심문에 답한 피네를 카즈윈은 가능한 한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는 심문을 참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완전히 사도화되었던 인간을 원래대로 되돌린 장본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카즈윈은 심문이 끝나가는 순간 이 자리에 있었다. 카즈윈다운 설득이 먹혀들어간 덕분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좋을 만큼 발버둥치고 우는 동안에도 기사단의 조장으로서 거리낄 만한 일은 하지 않은 것이 에일레르의 조장까지 올라간 그녀의 노력을 증명했다. 피네가 스스로 보고했던 대로, 어릴 적 몸에 침입했던 이질적인 신성력 때문에 신성기술이 다른 기사들보다 불완전하거나 정신에 흔들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고행 속에서 정신을 해체하여 심문한 결과 이젠 피네 자체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명되었다. 몸은 많이 상했지만 쉬면 회복될 것이다.
만약 선지자들이 이후 비슷한 일을 다시 시도할 경우에는 일선에서 피네를 제외할 수도 있지만, 인력도 부족한 지금 그녀를 해임하거나 처벌할 이유는 없었다.
진짜 그런 일을 겪은 듯이 맨발은 엉망이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엉망진창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피네를 대기하고 있던 힐러 대신 카즈윈이 안아들었다. 끝났다는 말을 한참이나 지나서 알아들은 피네가 그제야 되물었다.
"얼마나…… 지났……."
"4일."
카즈윈은 마지막 날밖에 올 수 없었다. 어차피 초기는 그저 고통으로 정신을 깎는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테니 지금 들어오게 해준 것이 다행이었다.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진실이라고 여기는 진심을 토해냈으니 이정도면 아주 멀쩡한 편이라고 위로할 만했다. 피네가 다 쉰 목으로 다시 물었다.
"결……."
"무혐의."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일은 생길지 몰라도 일단 사도가 되었던 것과 그간 숨겼던 사실에 대한 사항은 무혐의로 끝났다. 딱 피네가 바라던 정도였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지만 목소리가 들리자 안심이 되어서 피네는 웃으려는 것처럼 얼굴을 움직였다.
"……괜찮아."
신기하게도 그 말을 또 이해할 수 있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를 말이 며칠 전의 기억과 겹쳤다.
그녀의 신은 굳건하다고 카즈윈은 심문이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거기에 인간이 내놓는 결과도 무사히 넘어갔으니, 너는 틀리지 않았다고. 그 짧은 한 마디는 그런 식으로 전했다.
결국 그건 누구의 시험이었는가, 누가 누구를 시험하는가.
"카…… 즈윈."
"힘들면 말하지 마."
그 카즈윈에게 같은 말을 두 번 들은 걸 보니 상태가 매우 심각한 모양이라고 피네는 자각했지만, 더 말하고 싶었다. 조장으로서 마찬가지로 바쁜 카즈윈이 여기까지 시간을 짜내어 왔을 테니 지금 말해둬야지, 같은 계산이 깔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직 정신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할 말이 있었다.
"너…… 에게, 는."
"피네."
"……니까 보."
"피네."
"……."
희미하게 떴던 눈을 감은 그녀가 더 말이 없었다. 힐러에게 자리를 넘겨준 카즈윈은 일부러 물리적으로 그녀와 약간 멀어졌다. 피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곁에 있으려고 했을 텐데.
'알고 있어.'
그런 면들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가 빠른 카즈윈이 모를 수가 없었다. 신의 앞에서 모든 면을 걷어냈을 그녀의 모습을 보러가도 될지 처음에는 카즈윈도 결정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었다.
곁에 있고 싶다 해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알기에.
피네는 만족하고 있을까, 아마 눈을 뜨고 제정신을 차리면 웃으면서 괜찮다고 다시 말할 것이다. 하지만 카즈윈은 차라리 피네가 지금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너에게는, 부끄러우니까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그건 결코 괜찮지 않다는 진심이었다. 신께서 허락하시고 인간들이 용서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어진다면 좋았겠지. 그러나 남아있는 문제는, 그녀에게 문제를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카즈윈이었다.
인간은 가까이 다가갈 수록 상처를 드러낼 가능성도 커지고 만다. 말하지 않는 것에 익숙한 남자는 눈치채버렸다는 사실만으로 흉터를 건드리게 될지도 모른다.
피네를 안아올렸던 손을 쥐었다가 펴며 카즈윈은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떴다.
'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용서한다 하지도 그리하라 하지도 않으며 그저 굽어 살피고 있다. 그것은 그들 모두의 삶 전체에 걸친 장대한 시험이자 축복이니.
다음에 만날 때에는 다시 육체도 정신도 무장한 그녀를 보게 될 것이다. 괜찮냐고 묻지 않아도 괜찮아졌겠지만, 사실은 언제나 세계가 준 시험과 싸우고 있는 피네를.
누구도 모를, 그저 바라보는 시험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자기 자신을 카즈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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