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인 기념 연성입니다.
루에리를 만나고 싶었던 이야기.
삼하인 이벤트와 진단메이커 출처 문장이 모티브입니다(굵은 표기)
안개가 자욱이 낄 만한 날에는 외출을 삼간다. 더욱 그럴 만한 날이었지만 안개뿐이 아니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신경쓰지 않을 종족이 밀레시안이었다.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에서 그 밀레시안은 드물게도 조금 춥다고 느꼈다.
'하긴, 여기는 그 근처였지.'
스산한 던전 입구와 끝없이 펼쳐진 눈밭의 경계선, 그녀는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향 감각을 잃은 김에 앞으로만 나아가보니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눈사람들이 보였다. 어디인지 알 수는 있지만 돌아갈 자신은 없었다. 밤이 된지 시간도 좀 흐른 듯하여 그녀는 그대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냥 기다리면 해가 뜨고 이 안개도 걷히겠지, 능숙한 솜씨로 장작을 꺼내 불을 피우자 눅눅한 공기 속에도 반짝하고 빛이 피었다. 날씨가 영 좋지 않으니 몇 시간 지속되지 않을 불가에서 짐을 전부 내려놓은 채 그 밀레시안은 마지막으로 여기 온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았다.
'셰익스피어를 만나기 전…… 일까.'
이 앞의 던전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은 있어도 여기까지 온 적은 별로 없었다. 무릎까지 파묻혀버릴 듯한 눈밭을 건너 더 깊이 들어가면 봉인된 언덕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기억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이제는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아니 더 갈 생각이 없이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다.
기척이 느껴졌을 때에는 근처를 지나가던 늑대쯤 되리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그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곳을 처음 지나가던 때와 달리, 늑대의 발톱 정도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으므로. 손끝에 화살의 깃을 살짝 걸친 채 돌아보았을 때 보인 그림자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 그녀는 안심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도하고,
"그 버릇은 여전하네."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가 곧 선명하게 나타난 인영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는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밝은 얼굴로 손을 들고 웃으며 인사해주었다.
"여어, 스칼레타."
"루에리……."
결코 잊을 수 없을 이름을 부르며 곁에 앉은 붉은 머리의 검사는, 그 밀레시안이 가장 처음 그를 보았던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갑옷을 입은 채 허리춤에 검을 지니고, 던전을 걸으며 시원하게 웃을 수 있던 붉은 머리의 청년.
그녀가 다음 화살을 시위에 올리기 전에 화살깃을 특이하게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같이 싸우는 이가 없거나, 다들 자신의 싸움으로 정신이 없었거나, 그 밀레시안을 남겨두고 가버렸거나 하였으니.
그러므로 가장 오랜 시간동안, 함께한 적은 없어도 서로를 오래 봐온 그라면 알고 있을 만했다. 언제 어느 표적을 노리는지, 언제 활줄을 놓는지, 그 뒤에 새로 배운 기술로는 어떤 싸움을 할 것 같은지, 가까이서 하는 싸움을 왜 싫어하는지.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그런 사실에 생각이 닿고 나자, 그의 존재가 설명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된 그녀는 캠프 파이어 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태연하게 앉은 루에리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
"왜 그런 표정, 일 수밖에 없구나…… 미안."
"루에리……."
몇 번 바란 적이 있었다. 우리가 싸움터가 아닌 곳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밀레시안 스칼레타가 루에리라는 존재를 인식한 그 순간부터도, 서로를 잊을 수 없게 된 그 어느 날부터도 우리가 만난 마지막 이야기가 끝났을 때까지 이런 꿈을 종종 꾼 적이 있다. 에린의 여행자 밀레시안으로서, 그저 이 세계의 지나가던 전사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모닥불 곁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저 나는 밀레시안이라는 종족으로서 수련하고 여행하는 인간이고, 당신은 투아하 데 다난으로서 고뇌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 그렇게 만났더라면 서로를 이토록 잊지 못할 일도 없이 그저 평범한 인연을 엮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런 꿈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맑고 고운 두 눈동자가 뜨거워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라고 불리게 된 자는 그저 이 눈 쌓인 땅 위를 처음 밟았던 작은 여행자로 돌아가버린 것 같았다. 어깨와 등 위의 수많은 짐을 버린 것처럼 마음을 놓고, 이제 결코 볼 수 없는 이와 있는다면.
주저앉았던 다리에 힘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루에리에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닿은 전사의 흉갑은 차갑고 딱딱했다. 그가 멋쩍게 웃었다.
"음, 이런 반응일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말이야."
"루에리……."
"저기 말야, 나 어디 안 가. 그러니까 진정하고 얘기하자. 모처럼이잖아?"
모처럼, 두 번 다시 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가 말했다. 울 수가 없어 울 것 같은 얼굴을 끌어안기만 하고 그녀는 웅크려 앉았다. 루에리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아는 것처럼 말했다.
"이렇게 얘기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건, 나도 분명 아쉬운 점이 있었겠지. 나는 언제나, 너와 둘 중 하나가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 있었으니까."
"……."
"이제와서 내가 후회한다고 하면 비참해지는 건 너잖아.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언제나 있었겠지. 내가 조금만 더 나은 선택을 했더라면 잃어버리지 않아도 될 것들을 잃지 않았을까. 그리고 너와도 그렇게 될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
여신이 키홀에게 봉인되었던 이후로 이 세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아는 반신은 그저 입을 다물고 루에리를 보고 듣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웃고 있는 루에리는 그녀가 본 대로였고, 말하는 루에리는 그녀가 아는 대로였다.
"……역시, 어쩔 수 없네요."
"그래, 다 이미 알잖아. 나는…… 네가 아는 루에리니까."
순진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청년이 순식간에 검은 갑옷을 몸에 두른 기사로 바뀌었다. 얼굴이 변해버렸다고 해도 그 기사에게 적의는 없다.
이것은, 그녀가 아는 루에리다. 밀레시안으로서의 삶을 걷는 동안 쭉 한 편에 있었고,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마지막까지 떠나보내고 만 그 이.
"루에리."
"뭐지."
중후해진 목소리로 듣는 대답이 차라리 더 안심되어서 그녀는 이제야 실없는 웃음을 짓고 그에게 말할 수 있었다.
"진짜로 루에리는…… 나와 이럴 수 있었을까요?"
기회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그래주었더라면 내 마음의 무거움도 형언할 수 없는 커다란 자국도 조금 나았을까.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를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내 이기심이 아니었을까 하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리를 떠맡게 되어버린 밀레시안은 간신히 물어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아는 자는 그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네가 아는 나라면, 그랬을 거라고 믿어라."
그게 전부다. 루에리는 어느새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있었다. 그녀가 훔쳐본 기억이었다. 알비 던전을 동료들과 걸으며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할 수 있던 청년의 웃음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캠프 파이어의 불빛이 옅다. 거기에 취한 것처럼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이제 거기에 없었다. 그녀는 익숙한 무기를 내려놓은 채 조약한 류트를 들었다. 그 밀레시안이 그럴 리 없건만 이제 막 악기 수련을 시작한 듯이 엉망진창이어도 흥겨운 연주가 흘러나왔다. 붉은 머리의 전사는 여행길의 동료처럼 다리를 뻗고 앉아 그 곡조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불이 꺼진 것이, 아니면 날이 밝은 것이 먼저인지 밀레시안은 알 수가 없었다.
마법이 풀린 순간 연주는 멈추고 다 타버린 재만이 눈밭 위에서 불빛이 있었다는 증거를 남겼다. 가방에 모든 짐을 집어넣은 채 쓸쓸히 일어난 자는 다시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었다.
마을로 가는 길을 밟자 약간 아는 얼굴인 자경단원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했다며 인사를 건넸다.
"영 뒤숭숭한 날에는 노숙은 자제하세요. 아무리 밀레시안이셔도 말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걱정 뒤로 그녀는 부드럽고도 씁쓸하게 웃으며 마을로 내려갔다. 새벽 공기가 점점 더워지며 안개가 걷히고, 부엉이의 전갈을 받은 그 밀레시안은 새벽이 무슨 때였는지 깨달았다.
그 때의 삼하인에는 내가 아는 당신을 만났노라.
기록을 한다면 그리 한 줄 적을 수 있을 것이다. 덤비는 늑대에게 쏠 화살의 깃을 만지작거리며 그 밀레시안은 던바튼으로 가는 길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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