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조님께서 주신 커미션입니다.
톨비쉬와 밀레시안 클로드의 이야기.
(진조님께서 커미션 작업물의 전문 공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목은 진단메이커 출처로 시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송승언_ 축성된 삶의 또 다른 형태)
"클로드씨, 춥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근처의 나무에서 적당히 베어왔을 장작으로 피운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 타고 있었다. 일종의 건물 안이라고는 해도 무거운 밤공기는 막기 힘들었다. 장소가 외지고 인간의 흔적이 없는 만큼 추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량하게만 다가오는 날이 간혹 있었다. 그런 때에는 빨간 머리의 견습 기사가 호들갑을 떨며 춥다고 투덜거리면 슈안이 비품을 꺼내어 나누어주곤 했다.
지금은 춥다고 할 만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임무를 받을 수 있는 견습 기사는 전부 임무로 부재중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배정된 숙소에서 쉴 터였다. 문 너머의 경계에 정해진 시간이 없는 아르후안조를 잠시 도왔던 톨비쉬가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주섬주섬 장작을 들고 온 소년이 불을 피운 뒤였다. 아발론 게이트 내부 전반을 관리하고 있는 슈안도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여서, 이 불빛을 발견한 것은 톨비쉬가 처음인 모양이었다.
이계의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한 편에 여행자가 머물 곳이 갑작스럽게 생겨났다.
"가까운 벨바스트로 가시거나, 기사단 숙소에서 머무셔도 될 텐데요."
그렇게 말하며 톨비쉬는 상비하는 방패와 검을 내려놓고 그 곁에 앉았다. 어린아이 크기 정도는 되는 육중한 방패와 거대한 검이 얌전히 놓이는 것을 소년은 모닥불 빛을 통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자려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이 인기척과 빛이 모두 사라져가는 곳에 작은 불꽃을 피워올리고 살아있다는 숨을 내뱉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처럼 소년은 대답했다. 실로 밀레시안다운 느낌이 났다. 그들에게 낮과 밤이란 그저 이웨카가 지고 뜨는 정도의 차이뿐일지도 몰랐다.
"잠시 계시는 거군요."
"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곁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네."
허락을 받았으니 제대로 앉아 전투용 건틀릿을 고정한 끈을 느슨하게 풀어낸 톨비쉬는 재차 말을 걸었다.
"클로드씨는 여기에 이렇게 머무시는 건가요."
"가끔씩은요."
손때가 묻은 모포를 두른 어깨 위부터 클로드가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불에 시선을 계속 맞추었다. 그저 들리는 그대로 이해하면 될 듯한 말에서, 톨비쉬는 언제나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기엔 불편한 것들을 적당히 몸에서 풀어낸 톨비쉬는 클로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평범한 여행자처럼 캠프파이어 앞에서 곧 잠들 듯이 모포를 뒤집어쓴 클로드도 톨비쉬에겐 처음이었다. 함께 이런 적이 없으니 양쪽 모두 당연한 일이었다.
모닥불 타는 소리에 호흡을 맞추는 것처럼 주위가 고요했다. 스카하 해변의 괴기스러운 울음소리도 미치지 않는 게이트 안은 굳이 숙소가 아니어도 꽤 쉴 만하다고 생각하며 톨비쉬는 클로드를 보고 있었다.
평범한 여행자들이라면 모르는 사이라도 불 앞에 함께 앉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 법한 상황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쉽게 말이 오가지 않았다. 한 쪽은 다른 이들과 너무 다른 입장에 서있고, 한 쪽은 그런 이를 오랜 시간 지켜봐왔다. 클로드는 먼저 말을 꺼내는 편은 아니었고 톨비쉬는 지금도 이 소년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꺼질지 모르는 불빛을 의존하는 듯이 바라보는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톨비쉬보다 한참 작고, 그저 열서넛 먹은 어린 소년처럼 보이기만 했다. 앞으로 나서는 작은 등을 볼 때도 그랬지만,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얼굴이 눈동자를 깜빡거리고 있으면 때론 이런 아이 한 명쯤 어디에서 본 적이 있지 않나 싶어지곤 했다.
외양으로 밀레시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톨비쉬는 클로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의복과 모포에 둘러싸인 저 작은 몸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녔는지, 어째서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허나 모닥불 앞에서 감정 변화가 적어보이는 눈동자를 깜빡이는 이 소년을 보고 있으니 종종 들었던 생각이 형태를 갖추어 톨비쉬의 뇌리에 밀려들어왔다.
등 뒤를 보이는 전사는 언제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죽지 않는, 아니…… 죽어도 돌아올 수 있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요.'
밀레시안이라는 존재의 특이성이 에린에 알려지고, 기사단이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을 주목하고 있던 시간이 있으니 톨비쉬는 밀레시안에 대해 평범한 이들보다는 많이 알았다. 그들은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고 아무리 엉망진창이 되어도 돌아올 수는 있다. 마치 에린의 땅 위를 벗어나는 행위가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었다. 다만 심장을 찔리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다난과 다르지 않기에, 죽음이 두렵지는 않아도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싫어하는 것은 부활할 수 있는 밀레시안이라도 당연한 일이었다.
톨비쉬는 몇 번이고 보았다. 갑옷조차 제대로 두르지 않은 소년이 괴물의 발에 채여 날아가 뼈가 으스러져 숨이 끊어지고도 다시 눈을 뜨는 광경은 직접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분명 손이나 팔이 떨어져 나갔던 것 같은데도 부품을 갈아끼운 것처럼 그 육신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힐링이나 응급처치 따위는 의미도 할 시간도 없이, 언제나 가장 앞에서 싸우는 것은 그 소년의 등이었다. 갑옷을 온몸에 두르고 무거운 방패를 들었더라도 목숨이 여럿 있지 않다면, 절대로 저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헛되이 쓸 수 없을 뿐이지.
자신을 지켜줄 방패 대신 소년은 양손에 검을 들었다. 몸에는 두터운 갑옷이 없었다. 톨비쉬가 방패나 어깨 갑주로 막아내고 그리브가 덧씌워진 차올리며 검으로 반격할 때, 소년은 살을 내주고 뼈를 베었다. 때론 내장마저 몇 번이고 내어주고 적이 쓰러져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싸웠다.
비슷한 위치에 서서 싸우고 있기에 톨비쉬에게는 유난히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분명 비슷한 위치에서 역할이 겹치는 무기를 동일하게 들었는데도, 전투가 끝난 후의 상황은 너무도 달랐다.
소년의 몸이 몇 번이고 돌아와도 흔적은 옷에 남았다. 검은 의복이 검붉게 보일 정도로 젖어 붉은 방울이 발 아래로 뚝뚝 떨어지면 톨비쉬가 할 수 있는 것은 늦게라도 치료받기를 권유하는 일뿐이었다. 모순적이게도 그렇게나 다쳐서 죽었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치료할 것이 별로 없곤 했다. 이걸로 됐다는 듯이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거기에 대해 딱히 말이 없었다. 그럴 때에 톨비쉬가 입은 부상은 보통 미처 보호하지 못한 곳으로 날아든 예기치 못한 부분 정도였다. 오히려 그 별로 크지도 않은 부상에 대해, 훨씬 많이 다치고 몸이 부서졌을 클로드가 자책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해도,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달려들 필요가 있을까. 혼자 전투할 경우만 그랬다면 톨비쉬는 아마 그런 클로드를 볼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모습을 알았더라도 혼자 싸운다면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년의 싸우는 모습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근처 자리에서 그 역할을 나누어줄 이가 있다고 해도.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흩뿌리는 얼굴은 싸우는 중에 딱히 크게 달라진 적이 없었다. 그 내면도 아마 달라진 적아 없겠지만, 톨비쉬는 그저 눈치채고 있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감내하며 다시 눈을 뜬 이에게서는 소리 없는 절규가 비쳤다.
죽는 것도 다시 살아나는 것도 결코 편안할 리가 없다. 지금의 톨비쉬는 모닥불 건너의 쉬고 있는 소년에게서 생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활기가 아니다. 단순히 고요한 밤이라 의기소침하다든가, 피곤해서 조용하다든가 하는 문제라고 느껴졌다면 일단 말을 걸어보았을 터였다. 톨비쉬가 그간 보고 느낀 것들이 가리키고 있었다.
살아있는 소년은 마치 몇 번이고 죽었던 기억을 따르듯이, 살아있는데도 죽음과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거리낌 없이 죽을 수 있고, 거기에 수반될 고통도 감정도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죽지 않으니까 되는 일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친 삶의 방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알아차리는 데에 얼마나 걸렸던가.
톨비쉬에게 가장 위대한 그 밀레시안은 마치 언제나 죽어가는 듯이 살아가는 이였다.
"클로드씨."
"네."
"전부터 신경 쓰이던 점이 있습니다만…… 매번, 아프지 않으신가요."
클로드에게는 문득 날아온 질문이었다. 이 남자는 무엇이 아프냐고 물어보는 것인가. 톨비쉬는 진지한 기색을 띠고 덧붙였다.
"싸우실 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밀레시안, 정확히는 클로드씨가 치사 상태에서 돌아오신 모습을 몇 번이고 보고 나니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난인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 이상으로 괴로우신 것은 아닐까 하고요."
"다치면 똑같이 아파요."
톨비쉬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클로드는 무덤덤하게 그리 답했다. 딱 톨비쉬가 예상하고 있던 대로의 답변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듯한 태도에 톨비쉬가 손을 살짝 쥐었다 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익숙하시군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지는 클로드도 당연히 모르지만, 죽음을 주는 고통을 수없이 겪을 수 있는 종족으로 이 땅 위에 있는 탓이었다.
톨비쉬는 그 당연한 사실 앞에 이의를 제기하듯이 말했다.
"그런 아픔에 더는 익숙해지지 마세요. 죽음을 두려워 해주세요."
죽음을 두려워한 적도 거부한 적도 없는 소년에게는 참으로 생소한 요구였다.
"당신의 죽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언젠가 찾아올 겁니다."
반복되는 죽음을 통해 많은 갈림길을 건너온 소년이 처음 들을 수밖에 없는 제언에 대답할 말을 찾기 전에, 마주 보고 있던 톨비쉬가 어깨에 손을 얹어왔다. 기세가 약해진 캠프파이어 너머로 어둠에 가려져 클로드는 톨비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고 엄숙해보이는 목소리가 와닿았다.
"이렇게 클로드씨와 단둘이 앉아있으니 떠오른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톨비쉬의 푸른 눈은 이 말이 정도를 지나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클로드를 응시하려는 감정에 잠겨있었다. 그 눈을 마주본 클로드는 할 대답을 찾기 전에 깨닫고 말았다.
가장 앞에 서버리는 소년을 누구도 이런 식으로 바라보아준 적이 없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깝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은 범위, 그 애매한 선 위에서 그 기사는 클로드를 혼자 두지 않겠다던 다짐을 지키듯이 가까이에 있었다.
작은 어깨를 안은 손이 곧 꺼져버리는 불을 등지고 소년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온기를 나누어받던 캠프파이어 대신, 철갑을 벗은 손으로부터 따스함이 흘러들어왔다. 체격 차이 탓에 이렇게 거리가 좁아지니 클로드에게는 그의 얼굴이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다는 고동이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실감이 났다. 전해졌던 목소리처럼 부드러운 느낌이 소년의 죽지 않고 살아가는 몸을 감쌌다.
"……고마워요."
무엇에 대해 그렇다는 것인지 클로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고 톨비쉬는 묻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받아본 적 없던 마음을 비친 이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클로드를 감싸 안은 채 말이 없었다.
힘을 다했던 불씨마저 전부 바스라지고 이웨카가 사라져가는 기색이 보이면 누군가 다시 이 적막한 게이트에 모습을 드러날 즈음이 되어서야 톨비쉬는 클로드를 놓았다.
이 밤에 그 소년은 한번도 죽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었는지 톨비쉬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웨카의 시간을 함께 건넌 클로드의 얼굴은 모포 아래에서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이전보다는 조금 편안하게 보였다.
스스로 죽음의 횟수를 헤아리는 것은 소년에게 불필요한 일이었다, 어차피 홀로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면.
허나 돌아오는 자를 안아주는 이가 있다면, 부활은 외로운 귀환을 넘어 탄생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죽고 또 죽었고, 돌아오고 또 돌아왔으며, 그러다 어느 날 함께 하는 이의 곁에서 죽은 만큼 다시 태어나는 밤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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