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님의 밀레시안 첼의 진단메이커와
그림 (누르면 링크)을 모티브로 하는 연성입니다.
진단메이커 문장은 굵은 표기가 되어있습니다.
"첼씨."
"왜."
"거짓말은 좋지 않은 습괸이라고 하면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하실까요?"
"잘 아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소년에게 매우 익숙해진 톨비쉬는 농담조로 맞받아쳤다.
"에린의 수호자께서 이렇게 진짜가 아닌 말을 수없이 하시는 분이라니 통탄할 일이군요."
"그걸로 세계를 구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야 늘."
"그렇게 구할 수 있었다면 저도 거짓말을 했겠지요."
"살면서 한번도 안 해봤다고 할 셈인가?"
"글쎄요, 적어도 주신께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지극히 신의 기사다웠다. 그렇겠지, 자신이 믿는 신에게는 말하기도 이전에 거짓이 존재하지 않을 터다. 첼에게는 없는 개념이었다.
"그럼 나는, 그 반대 비슷한 거겠네."
톨비쉬는 되묻기 전에 생각할 줄 아는 남자였다. 첼이 말한 맥락을 거슬러 올라가자 대충 파악할 수 있었던 톨비쉬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들키실 거짓말을 만나는 사람마다 하시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첼씨가 하는 말이 가끔씩 제 기억과 맞지 않는 것은 의도적이신 건가요? 무언가 의미가 있으시거나요.'
북쪽 땅의 드루이드는 첼이 로브를 입고 오지 않은 날, 로브가 없어도 춥지 않냐고 물었었다. 첼은 망가져서 버려서 없다고 새 로브를 살 거라고 했다. 며칠 후 첼은 그 드루이드가 기억하는 로브를 다시 입고 나타났다. 새 것이라기에는, 전에 보았던 손상된 부분이 완벽하게 똑같은 옷이었다.
첼은 자신이 했던 대답을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의도적이진 않아. 의미는…… 있을까?'
"의미? "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첼이 한참 큰 톨비쉬를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톨비쉬는 생각보다, 아니 언제나처럼 끈질겼다.
"거짓말은 보통 중요한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편이죠. 선의든 악의든 간에요. 하지만 첼씨의 말에는…… 아무리 봐도 그런 의도가 없으니까요."
중구난방으로 특정한 방향성이 없는 말들은 지금 첼이 입고 있는 옷이 사실 빨간색이 아니라고 하는 수준의 것들도 많았다. 눈앞에 멀쩡히 시각을 태울 듯한 강렬한 색이 존재하는데도, 너무 태연하게 말해버리면 아주 잠깐 속아버릴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결국 금방 들켜버리지만 말이었다.
"의도 없는 행위를 계속하신다면 그건 이미 몸에 배어계신 것이니, 첼씨에겐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톨비쉬."
"예, 왜 그러시죠?"
"넌 너무 말이 많아."
"첼씨에게 관심이 많아서라고 생각해주세요."
"조금 더 하면 스토커 취급할 거야."
"부디 이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군요. 저는 첼씨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거든요."
말이 많다니까, 도저히 입을 틀어막을 수 없는 남자를 눈앞에 두고 첼은 눈을 감았다. 대충 그런 말이었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딱히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아무 말도 해주시지 않는 것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가?'
'첼씨가 오기 전엔 아무도 없었던 이 곳이 적어도 당신의 말로 채워질 수 있으니까요.'
그게 어떤 말이든 간에, 하얀 입김밖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건 그 사람에게 꽤 괜찮은 일이었나 보았다.
살아가며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습관에 의미를 붙여준 것은, 그 안경을 낀 드루이드.
'그러니 제 기억과 다른 말을 하셔도 앞으론 모른 척해도 될 것 같군요.'
'봐준다는 뜻처럼 들리잖아.'
'그저 듣는 거지요. 존재하는 말 그대로를요. 자연의 말을 듣는 것처럼요.'
눈을 뜬 첼이 물끄러미 톨비쉬를 쳐다보았다. 나쁜 습관이라고는 했지만, 이 남자는 대놓고 하지 말라고는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 보통은 거짓말이 습관인 걸 알면 그런 반응이었다. 첼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스토커는 거짓말도 농담도 아냐. 대체 내 말이 거짓말인 걸 알고 들으면서 왜 나한테 자꾸 붙어있는 거야?"
"말의 진위를 판별해내는 것과 별개로, 첼씨의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이죠."
그래서 스토커 소리를 들어도 첼이 보이면 말을 걸고 곁에 있는 거라고 톨비쉬가 말하기 전이었다. 톨비쉬는 아주 가끔 감지하는 첼의 변화를 보았다. 놀라움으로 동공을 수축시킨 채 다음에 할 말로 사고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상태의 첼은 보기 드물었다. 정확히는 톨비쉬의 앞에서만 종종 그랬기 때문에 평소엔 그럴 일이 없었다.
습관처럼 한 손을 머리에 갖다댄 첼이 골이 쑤신다는 표정으로 평소처럼 돌아와서 기가 차는 소리를 냈다. 이 기사는 매번 예고도 없이 첼을 놀라게 한다. 이럴 거라고 예상한 적도 없고 사실 비슷하지도 않은 부분을 연상까지 시키면서.
"……이봐."
"어디 안 좋으신가요?"
몇 번 겪었으니 다 알면서 이러는 것 같았지만 첼은 거기에 뭐라고 할 생각보다는 다른 마음으로 가득 차있었다. 가까운 곳의 톨비쉬를 밀어내듯이 팔을 내민 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들어. 의미가 있냐고 했지?"
그냥 살아가다 보면 생겼다는 것은 결국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다는 뜻이다. 에린에 홀로 떨어진 별은 어느샌가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했겠지.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뿐이었을 텐데, 한 드루이드의 말이 새 의미를 부여해버리고.
의미를 준 이가 떠나버리고 난 뒤에는 잃어버린 자리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한 말이 거짓처럼 덧없이 떠돌았다. 거짓말쟁이의 말은 스스로에겐 참으로 덧없었다. 내뱉기 전부터 진위를 아는 말은 거짓말이 될 수 없으므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톨비쉬에게 말해봤자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다. 그러니 거짓말쟁이는 말했다.
"살기 위해 했다고 하면 어차피 기사인 당신은 이해할 수 있어?"
"첼씨의 삶이 그랬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요."
"거짓말쟁이란 족속들은 말야, 우린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서 거짓말이 필요해."
톨비쉬가 잘 아는 얼굴이 보였다. 외모는 소년인 주제에, 첼은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댄 채 세상 다 산 것 같은 웃음을 띠었다.
"그런 거짓말에는 이유가 없어. 그냥 그게 편해, 곧 들킬 말이어도 지껄이고 있는 데에 무슨 논리가 있겠어?"
속이고 들키는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말하고 듣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드루이드가 보는 공허한 밤하늘을 채워줄 말이 필요했듯이.
첼의 붉은 눈동자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최근 매번 첼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언제나 톨비쉬였다.
"내 말에 의미를 붙이는 건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 듣는 사람들이지."
그 드루이드가 가만히 들었고 이 기사가 이렇게 시끄럽듯이, 첼의 말이 지닌 의미는 그들이 주고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니 멋대로 생각해."
"과연…… 답은 첼씨가 아니라 제가 갖고 있는 것이었군요. 여쭤본 제가 한 방 먹었습니다."
톨비쉬가 첼을 달래듯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으나 첼은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 상대하기 힘든 인간인데, 이렇게 있으면 자꾸 되는 대로 말해버리게 되어서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더 말 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절레절레 내저은 첼은 기사단 근처에는 한 달은 안 올 거라는 뻔한 거짓말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벨테인 특별조의 기사들이 그 전에 임무에서 귀환하면 하루쯤은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톨비쉬가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첼의 말을 듣고 싶다면 거짓인지 진실인지 전혀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스스로의 통찰력이 약간 원망스러워진 톨비쉬는, 그 의도 없는 거짓말들 속에서 떠도는 거짓말쟁이의 진심을 찾고 있었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톨비밀레] 숨쉬는 자에게 고한다 (0) | 2015.11.20 |
---|---|
[사도화] 나를 돌아보지 말아요 (0) | 2015.11.14 |
[루에밀레] 아는 당신을 만나는 날 (0) | 2015.11.05 |
[커미션] [톨비밀레] 네가 죽은 만큼 네가 태어나는 밤 (0) | 2015.10.31 |
[카즈피네] 저를 시험에 들게 하소서 (후) (0) | 2015.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