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메이커 출처 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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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을 빌린다고 해도 덫에 넘어가지는 않았겠지만, 그대가 사랑스럽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그 밀레시안은 사람을 먼저 찾아오는 성격은 아니라고 톨비쉬는 생각했었다. 차라리 너무 오는 사람을 막지 않아서 문제였지.
고행하는 신의 기사에게 정해진 거처는 없었다. 거처가 있다 해도 누구에게 알려줄 일은 사실 없을 터였다. 드넓은 이리아를 돌아다니는 중이라면 더욱 그랬다. 보통 3인 1조로 움직이는 알반 기사단이어도 엘베드 조의 조장은 단독 행동이 유난히 잦았다. 융통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파격적인 기사나 할 만한 일이었다. 다른 조의 조장들이 본다면 한 명 정도만 제외하고 그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였다.
이리아의 밤은 인간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캠프 파이어를 벗삼아 무장을 반쯤 해제하고 무릎 위에 모포를 덮었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는 불침번을 세울 수 없으니 반쯤은 자고 반쯤은 깬 상태로 짧은 밤을 지새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노곤하게 밀려오는 잠과 함께 톨비쉬가 눈을 살짝 감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랐다.
부자연스러운 인기척이 났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톨비쉬가 검 손잡이를 쥐기 전에, 건틀릿을 끼지 않은 그 손을 부드럽게 무언가가 감쌌다.
캠프파이어의 빛에 비친 얼굴이 순간 일렁였다. 톨비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스칼레타씨."
"놀랐어요?"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대체 어디서 나타나신 건가요? 제가 여기 있는 줄 아셨을 리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냥 보였어요."
톨비쉬는 그 말이 이리아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보았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대륙을 건너는 여행자에게 불빛은 반가운 일이다. 배시시 웃은 소녀는 머리를 가린 모자를 뒤로 벗었다. 곱게 땋아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친숙한 밀레시안은 그대로 톨비쉬의 곁에 앉았다.
"자려던 걸 내가 방해했나요?"
"노숙이니 어차피 깊게 잠들 수는 없었습니다. 스칼레타씨가 불침번을 서주시면 잘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건 순수한 농담이었다. 굳이 그녀에게 불침번을 부탁하고 잠들 것까지는 없었다. 몇 시간 쉬고 일어난 뒤 목적지에 도착해서 다시 대기하고 임무를 수행하여 돌아가고 난 뒤 안정을 취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톨비쉬는 그래서 언제나 진지한 그녀가 불침번을 서주겠다고 말하면 진심이 아니었다고, 역시 언제나 그런 분이라고 대답할 생각이었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 들렸다.
"방해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톨비쉬가 잠들어버리면 얘기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여전히 톨비쉬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상식선 안에는 있는 밀레시안이니 톨비쉬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 거였나요?"
"네, 아주 중요한 이야기요."
그녀가 톨비쉬의 옆에 몸을 바짝 붙여 앉았다. 밤의 추위를 피한다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웠고,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추위를 탄다는 말은 딱히 들어본 적이 없었다.
"스칼레타씨."
"톨비쉬랑 둘만 있게 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올 줄은 몰랐네요……."
반짝거리는 맑은 눈동자가 톨비쉬를 수줍게 올려다보았다. 톨비쉬는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했지만, 한 편으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원래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순수한 밀레시안이기는 했어도 그녀가 지금까지 이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한다기에는 상황이 이상했다.
"톨비쉬."
"네, 말씀하시죠."
끌어당겨진 팔 위로 무엇인가 부드러운 게 닿은 것 같았지만 톨비쉬는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마땅히 그래야할 일이었다. 톨비쉬의 팔을 끌어안은 채 목을 길게 뺀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망설여져서 계속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기, 참을 수가 없어서……."
"스칼레타씨."
"정말, 좋아해요."
갑주가 벗겨진 어깨 위로 무게가 실렸다. 뺨으로 얼굴을 기댄 채 표정을 숨긴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부끄럽기 때문이 아닐까. 고백을 들은 당사자는 약간 굳은 얼굴이었다. 톨비쉬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는 망설이는 듯하면서 계속 말했다.
"톨비쉬가 누구보다 신실한 기사인 것도, 구해야할 것들이 많은 것도, 지금도 이렇게 선잠을 자야할 정도로 힘든 것도 알지만 조금 전에 톨비쉬를 보고서 나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건틀릿을 벗어두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밀착된 몸 사이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톨비쉬가 시선을 살짝 돌리자 홍조 어린 얼굴에 수줍은 눈동자가 눈을 피했지만 몸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칼레타씨, 저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난 정말 괜찮으니까."
조심스럽지만 대담한 손길이 톨비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매듭을 지어놓지 않은 로브가 어깨부터 흘러내렸다. 톨비쉬는 조금 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맨 어깨가 그대로 보이는 옷은 전혀 여행에 적합하지 않은 복장이었다. 로브 바깥으로 뻗어나온 손이 톨비쉬의 가슴팍 위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냥 지금만이라도…… 여긴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조곤조곤 달콤한 음성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이대로 녹아버릴 듯한 감촉이었다. 가슴 부분을 보호하는 판 사이로 가녀린 손가락이 쓰다듬은 자리가 타는 것처럼 간지럽다. 앞섶이 다 벌어진 로브 뒤로는 깨끗한 피부처럼 투명한 하얀 원피스가 사실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있었다. 그녀가 톨비쉬의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위쪽에 올려놓았을 때, 톨비쉬는 잠시 이와 입술 사이에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떼었다.
"그만두십시오, 스칼레타씨."
"내가 이러는 건 싫어요……?"
이거 정말 미칠 노릇이로군. 일렁이는 불꽃에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입이 잘 열리지 않는다. 신발을 벗은 매끈한 다리가 흰 스타킹에 감싸여 무릎 꿇은 채 그의 다리 위에 슬쩍 걸쳐졌다. 말보다는 확실히 적극적인 유혹이었다. 동결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톨비쉬가 굳어있는 사이 그녀는 톨비쉬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대며 그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다리로 허리를 감싸듯이 다가갔다. 팽팽하게 당겨진 가터벨트가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이 이상은 톨비쉬도 감당할 수 없었다.
"꺄악!"
벌떡 일어난 톨비쉬에게 밀쳐진 그녀가 살짝 나동그라졌다. 완전히 딱딱하게 변한 표정으로 톨비쉬가 말했다.
"무슨 수작인지 두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친 짓을 하는군요, 브릴루엔."
그녀가 바닥에서 배를 잡고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뭐야, 역시 알고 있었잖아요. 재밌어지려는 참이었는데 말이죠."
"유감스럽게도 저는 재미가 없군요."
톨비쉬가 아는 '그녀'의 모습을 한 서큐버스가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바닥에 턱을 괴고 누웠다. 문 너머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서큐버스가 무슨 수단으로 톨비쉬의 앞에 나타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재밌어보였는데요? 그 잘나신 기사님도 호감 있는 상대가 이러면 당황하긴 하는구나 싶어서 말이에요. 관찰했던 보람이 있는 걸요."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이렇게까지 흉내를 못 내서야 서큐버스 실격 아닙니까 브릴루엔?"
톨비쉬가 신랄하게 지적하자 남의 모습을 빌린 서큐버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아벨린이야 그렇다 치고 이번에는 꽤 착실히 재현했다고요. 그러니까 잠깐 내버려뒀던 거잖아요. 언제부터 눈치챘는지 알려줄래요? 다음에 참고하게."
"각하하죠."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사실 마음은 좋아해서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할 건데요! 내가 몰랐을까봐? 두근거리는 심장도 달아오르는 체온도,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나봐요?"
브릴루엔의 말대로였다. 그건 꽤 착실한 재현이었다. 복장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 그 밀레시안이라면 그런 옷 위에 로브 한 겹만 입고 여기까지 오는 것도, 태연하게 갑자기 고백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정말 그런 식으로 톨비쉬에게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저 너무 능숙한 것이 문제였다.
"서큐버스로서의 스킬은 나쁘지 않았다고 해두죠. 전혀 스칼레타씨와 어울리지 않지만요."
"아, 역시 거기부터가 문제였나? 하지만 다른 건 전부 진짜인걸요."
"브릴루엔."
"신기하게도 문 안에서 보이는 게 많던데요. 스칼레타가 당신에게 반한 것도 가까이 지내고 싶지만 방법은 잘 모르는 것도, 아마 몸으로 돌격하면 가까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깨달으면 비슷한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전부 진짜니까!"
그건 기쁜 일일지도 몰랐다. 다만 브릴루엔은 지금, 자기가 그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톨비쉬를 유혹한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기쁘지 않았냐고 도발을 걸 뿐이었다. 넘어가서는 안 된다. 톨비쉬는 차분하게 검 손잡이를 잡았다. 요망한 서큐버스가 또 깔깔 웃었다.
"그만두지 그래요?"
"더 이상 스칼레타씨의 모습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제가 용납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후회할걸요? 이거도 진짜거든."
검을 집어들고 전투 태세를 취한 톨비쉬를 멈추게 만들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브릴루엔은 여기까지 작정했던 것 같았다.
"톨비쉬 당신쯤 되면 알고 있지 않아요? 밀레시안이란거, 뭔가 씌이기 쉬운 체질이라던데 말이에요. 그래서 나도 한 번 해봤는데 생각보다 잘 되던데?"
"그럼 지금 이건."
"정말로 스칼레타의 몸이라는 얘기죠. 그러니 넘어갈 만 하잖아요?"
그런다고 해서 톨비쉬의 마음에 위안이 될 일은 없었다. 검을 쥔 손에 힘만 주고 움직이지 않는 톨비쉬를 보며 남의 몸으로 요염하게 누운 브릴루엔은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베어도 될 텐데, 어차피 밀레시안은 죽어도 다시 돌아오잖아요?"
"브릴루엔……!"
"아, 드디어 화난 거면 소득이 있네요. 뭐 끝까지 눈치 못챌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생각보다 빨리 끝났지만 반응은 재밌었으니까 이제 됐어."
아무리 몸을 빌린 상태라고 해도 기사의 검에 베이면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톨비쉬라는 남자의 속내를 캐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긴 했지만, 밀레시안의 특성을 믿고 톨비쉬가 정말로 베어버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브릴루엔은 약올리듯이 박수를 치며 일어났다.
"자, 내가 주는 꿈은 여기서 끝. 나머지는 진짜와 잘 해보세요, 안녕."
가증스러운 박수소리가 끝났다. 섬광이 시야를 가려버린 것처럼 눈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던 톨비쉬가 무사히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엔 모닥불은 꺼져있었다. 이리아의 변함없는 밤공기가 몸의 틈새로 흘러들어왔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가 로브를 베개삼아 자는 것처럼 누워있었다. 톨비쉬는 헛웃음을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 앉은 뒤 상태를 살피자 큰일은 나지 않은 듯했다. 아마 단순히 씌었다가 벗어난 정도이니 기다리면 곧 깨어날 일이었다.
'쉬기는 틀렸군.'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현혹되지 않아야 하지만 서큐버스가 말했던 것들이 진실이라면, 아니 그의 이성이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라면 좋겠다고 톨비쉬는 내심 생각했다.
이 낙원을 사랑하고 지키는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 유일하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이가 자신이라면 톨비쉬는 기꺼이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검을 놓지 못한 손 대신 비어있는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어깨에 기대었던 부드러움과 같은 감촉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가녀린 목과 팔다리는 아름다웠다. 서큐버스 따위 들어있지 않은 지금이, 훨씬 더.
지금이라면 그녀를 끌어안아도 괜찮을지도 몰랐다. 서큐버스가 속삭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둘뿐이니까, 여기에는.
직접 만진 어깨는 조금 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 작고 둥글었다. 톨비쉬는 거기에서 잠시 손을 거두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누워있는 그녀를 그렇게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역시 그만둘까.
톨비쉬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조하였으니 그 말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이 이상 나아갈 생각이 있었던 적은 없지만, 브릴루엔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서 스스로를 시험하고 있었던 톨비쉬는 말없이 일어나 모포를 가져왔다. 딱 그녀의 몸 정도는 전부 가릴 만한 크기였다.
지독한 덫에 빠졌다가 놓여난 기분이었다. 톨비쉬는 문제의 서큐버스에게 설욕을 다짐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녀가 일어나서, 자신이 왜 여기에 있고 톨비쉬가 어째서 곁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해줄 말을 고민하며 톨비쉬는 홀로 동이 트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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