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얀데레 알터 주의
알터와 외형적 특징을 공유한 밀레시안과 그런 밀레시안에게 집착하는 알터 이야기
지금 생각해보니까 정말,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 놀랄 이유가 사실 없었던 거예요. 운명이었으니까.
그래도 그 때 놀랐던 건 사실이에요. 정말 깜짝 놀라서 발이 멈춰버리고 기뻐서 심장이 요동쳤어요.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으음, 역시 지금은 이름을 부르는 것도 쑥쓰럽네요.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시니까 지금은 밀레시안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직접 만날 때까진, 계속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밀레시안 중의 밀레시안, 저에게 밀레시안이란 단어는 다른 누구도 아니었으니까요. 오직, 한 명뿐. 지금 제 앞에 계신 분이요.
만나서 놀란 것뿐만은 아니었어요. 사실 저는 밀레시안님에 대해 아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았거든요. 알반 기사단이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아는 것과 제가 아는 것이 그렇게까지 다르진 않았을 거예요. 어느 정도냐면 저는 그 날, 소문으로만 듣던 날개를 보고 그 밀레시안님이라고 알았으니까요.
세상을 사랑으로 비추는 라이미라크처럼 새하얗고 때묻지 않는 그 날개가 제 눈앞에 있었죠.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바로 알 수 있었죠, 내가 오랫동안 존경하고 바라던 분이 여기에 있다고. 꼭 손을 잡아보고 싶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악수를 청했어요. 그 때까진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가,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한 밀레시안님을 보고 깨달았어요.
아, 왠지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익숙한 색이 어우러진 당신에게서 느꼈던 기쁨을 그 때는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어요. 아마 몰랐을 뿐이지 제 안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만요.
외모 정도는 마음대로 바꾸실 수 있는 밀레시안에 대해서 아무도 당신의 외모를 기록하는 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겠죠. 그냥, 제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 조금이라도 저와 비슷한 점이 있는 밀레시안님을 만났다는 건 역시 운명이었을 거예요.
나와 닮은 밀레시안님.
그런 밀레시안님을 만난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임무를 위해 두 번째로 뵈었을 때도 세 번째로 뵈었을 때도 밀레시안님은 저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이셨어요.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과 영롱한 초록빛 눈동자가 아름다우셨죠. 머리카락을 만져보면 안 될까 말씀드리지 못했던 건 아벨린님이 계셔서였어요. 이젠 거의 기사단원이나 다음없으신데, 제가 밀레시안님과 더 가깝게 지내면 왜 안 되는 걸까요? 아벨린님을 가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밀레시안님은 제 편이시죠?
결사단의 임무가 끝난 다음 저는 아발론 게이트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아벨린님이 게이트에 거의 묶이다시피 계시니 저도 함께 있어야하고, 세 번째 조원으로 예정된 기사를 아벨린님이 교육하실 수 없게 되어서 아르후안 조의 새 조원이 들어오는 것도 늦어져버렸으니까요. 선지자들이 언제 움직일지, 또 사도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아발론 게이트에는 아직까지는 아무 일도 없어요. 게이트의 안을 주시하는 아벨린님과 저, 그리고 기사단을 보조하며 임무를 수행하고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계속하는 견습 기사단원들이 있을 뿐이었죠.
아발론 게이트에 있는 저를 만나러 와주신다는 약속은 사실 지켜주시지 못했어도 저는 섭섭해하지 않았을 거예요. 밀레시안님은 위대하신 만큼 바쁘시니까요. 피네님을 도와주셨던 것도 그렇고, 정말정말 대단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 지금도 시시각각 위협이 닥쳐오는 이 세계에서 가장 바쁘실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가끔 뵐 수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의 상냥한 밀레시안님은 약속을 지켜주셨어요. 저를 만나러 생각보다 자주 와주셨죠. 사실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밀레시안님께 벨테인의 견습 기사들을 맡긴다고 들었을 때는 의아했어요. 그건 뭐라고 해야할까, 밀레시안님이 하실 수 있는 아주 많은 일들 중에서 사소한 일이 아닐까 싶었어요. 물론 누군가의 사소한 고민도 도와드릴 수 있는 상냥한 분인 게 저는 좋지만, 지금은 언제 이계의 신이 찾아올지 모르는 급한 때니까 견습 기사들을 굳이 맡으셔야할까 싶었거든요.
저에게 좋은 점이 있었다면, 견습 기사들의 훈련과 임무를 위해 아발론 게이트에 오시는 횟수가 조금은 더 늘어난다는 거였어요. 저를 만나러 오신 게 아니어도 먼 발치에서라도 밀레시안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은 견습 기사…… 누구더라? 아무튼 여자애였어요. 그 애가 말하는 걸 어쩌다보니 들었어요. 거리도 꽤 멀었는데 어떻게 들렸는지 신기하네요. 조장님을 처음 봤을 때 놀랐다는 이야기였어요. 멀리서 봤을 때 알터 선배님인 줄 알았다고요. 물론 머리길이도 다르고 몸집도 다르고 무기도 다르니 길게 지속될 수 있는 착각은 아니었겠죠. 그 말을 들은 다른 견습 기사들이 동의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맞아, 좀 비슷했지. 아발론 게이트에 같이 서 계시면 가족처럼 닮아보여.
아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구나. 같이 결사단이었던 조장님들은 그렇게 말해주신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견습 기사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안심했어요. 저만의 몽상이 아니라 정말로, 밀레시안님과 저는 닮았군요. 그래서 기뻤으니까, 밀레시안님과 제가 닮았다는 것을 인정 받은 기분이어서, 밀레시안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견습 기사들의 조장이 되신 건 아무래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그 후에 그 키가 큰 견습 기사와 나누신 대화를 들었을 땐 피가 식었어요. 왠지 모르게 소름도 돋았죠. 저는 그간 밀레시안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요, 밀레시안은 얼굴도 성별도 바꾸실 수 있죠. 그게 밀레시안이니까. 어느 날 제게 가까운 그 머리카락과 그 눈동자를 버리고 처음 보는 모습이 되어 제게 찾아오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너무 당연한 일인데.
그래도 깨닫고 나자 꼭 여쭤보고 싶었어요. 두려우면서도 받아들여야할 일이었거든요. 제가 이렇게 경애하는 분은 밀레시안이시니까요. 그래서 저에게 안부 인사를 하러 오셨을 때 잡담을 하다가, 옷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슬쩍 여쭤보았어요. 역시 밀레시안이니까 언젠가는 모습을 바꾸실 수도 있는 거냐고. 많이 바뀌어버려도 꼭 당신을 알아보고 싶으니까요.
물론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밀레시안의 육체는 다난과 다르니까, 바꾸는 것은 어렵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게 저에게는 조금 슬펐어요. 제가 그토록 가슴 설렜던 모습이 사라져버려도, 어떤 모습이 되어서 오셔도 저는 밀레시안님을 좋아할 거지만요. 풀이 죽어버린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썼지만, 누군가 눈치챘었을지도 몰라요. 곁에 계셨던 아벨린님이라든가, 들킬 거라면 역시 밀레시안님께만 알려드리고 싶었지만요.
그런데 밀레시안님이 다시 말하셨어요. 지금 모습에 대해 묻는 거라면, 아주 오랫동안 비슷한 상태셨다고요. 가끔 다른 모습이 되기도 했지만, 그 차분하게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과 다정하고 온화한 빛이 감도는 초록색 눈동자인 채 밀레시안으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아오셨다고. 외모를 고정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밀레시안들도 많지만, 이유는 잘 몰라도 지금 이 모습이 가장 좋으니까, 이 상태로 여기에 있는 거라고.
그 때 깨달았어요. 제가 그 날 타라에서 운명적으로 당신을 만난 후의 밀레시안님은 분명 제가 모르는 사이에 몇 번은 환생을 하셨겠지만, 단 한 번도 모습이 바뀌시지 않았단 것을. 몸에 맞춰입은 갑주 위로 늘어뜨려진 우아한 머리카락과 살짝 웃으실 때 가장 찬란해지는 그 눈동자, 그리고 모두가 칭송하던 그 하얀 날개가.
저는 지금의 밀레시안님 모습이 너무너무 좋았어요. 잘 어울리신다고, 제게 밀레시안님은 그런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죠.
심장이 터져버릴 것 처럼 두근거렸어요.
알터가 좋아한다면, 나도 좋아요.
그렇게, 말씀해주셨으니까.
그 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아발론 게이트가 소란스러워졌을 때 저는 움직일 수 없었어요. 아벨린님이 제 어깨를 붙잡으셨거든요. 무슨 일이 있다면 슈안이 와서 이야기해줄 거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저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답니다. 그게 소중한 밀레시안님과 관련된 일인 걸 알았다면 아마 아벨린님이 붙잡으셔도 뛰어가려고 했을 거예요.
임무에서 돌아오지 않는 견습 기사들을 찾으러 가셨다가 심한 부상을 입으셨다고 하는 밀레시안님께는 제 얼굴 같은 건 보이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저에게도 밀레시안님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어요. 단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운 없는 걸음걸이로 치료소까지 스스로 가시는 모습이 보였을 뿐이었어요. 부축도 거절하신 것은 아마 도움 받은 견습 기사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을 거예요. 그 조약하기 짝이 없는 치료소에서, 다른 견습 기사들이 어떻게든 도와드리려고 소란스러워진 것이 들렸어요. 슈안씨가 아벨린님과 제게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 뒤에,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제가 간다고 해서 저기 견습 기사들보다 딱히 더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걸 아벨린님도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당연하지만 견습 기사들은 신성력도 약하고 치료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도 없었어요. 섬세한 거나 지식적인 것으로 치면 괜찮은 견습 기사가 있긴 있을지 몰라도, 그게 밀레시안님에게 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 테니까요. 결사단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에 본 적이 있었거든요, 밀레시안님의 응급치료 실력은 기사단의 어지간한 힐러보다 훨씬 뛰어나셨던 걸요. 결국 아무도 치료를 도와드리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었겠지요. 그래서 아무도 밀레시안님께 손을 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이 아닐까 했어요. 저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굳이 누군가가 도와드리지 않아도 밀레시안님은 스스로 딛고 일어나실 수 있으니까.
제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쭉 보시던 아벨린님이 딱 30분이라며 시간을 주셨어요. 누군지 모를 견습 기사가 긴장한 채 아벨린님 곁에 서고 저는 치료소에 가서 거의 다 회복되신 상태의 밀레시안님께 말을 걸 수 있었죠.
괜찮으시냐고 묻자 당신께서는 이제 괜찮아졌다고 하셨어요. 평소 갑옷이나 긴 옷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던 팔다리에 응급치료를 하고 힐링을 걸어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흔적이 드문드문 보였어요. 회복이 빠른 밀레시안이라도 도저히 피해갈 수 없을 만큼 큰 부상이 준 자국이었어요.
그걸 걱정하자 밀레시안님은 늘 그랬듯이 웃으면서 말해주셨어요.
이 정도는 환생을 하면 금방 사라지니까 괜찮다고.
그래도 아프지 않으셨어요?
물론 아팠어요, 알터.
아픈 건 밀레시안도 다난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어쩐지 표정이 조금 슬퍼지신 밀레시안님은 치료소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 옆에 서서 풀이 죽은 제 어깨를 두드려주셨어요.
그러니 몸을 소중히 여겨요, 알터.
그럼 밀레시안님은요?
나도 물론 그럴 거예요.
저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목 너머로 무겁게 삼키는 기분이 들었어요. 기억이 나버렸거든요. 바로 이 아발론 게이트에서, 고작 조원급 기사인 저는 강대한 사도와 선지자들 앞에서 제대로 무언가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져내렸죠. 저는 그 때 크게 다치지도 않은 편이었을 거예요. 조장님들과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님이 곁에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말이에요, 언제나, 저기, 가장 앞에서 싸우셨잖아요. 쓰러졌다고 해도 느낄 수 있었어요. 신의 힘을 몸에 두른 당신께서 사도를 쓰러뜨리고 그 자리에 서계시는 것을.
언제나 그러실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님의 운명일까요? 당연하게도 다칠 수밖에 없는 곳이잖아요. 모든 이들을 지키는 가장 앞의 자리. 그 날 가장 먼저 쓰러진 제 몸에 흉터나 큰 부상이 없는 건 분명 밀레시안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저는 확신할 수 있어요.
그 날 치료소에서 밀레시안님과 대화하던 저는 다치지도 않았는데 말레시안님의 상처 자국에서 이제는 사라졌을 아픔이 제 것처럼 느껴질 것만 같았어요. 제가 당신 대신 다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직 위대한 밀레시안님처럼 될 수 없는 저는 무력해서 가장 앞에 서는 자가 몸에 새겼을 아픔을 상상하는 것밖에 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러자 신기하게도 몸을 휘감았던 눅눅한 기운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대신 정신이 환하니 깨어났어요.
잘 생각해보니 저 대신 가져가셨을 아픔을 돌려받는 듯한 기분이었을 거예요. 제가 언젠가 밀레시안님과 같은 곳에 설 수 있을 때까지 밀레시안님이 대신 가져가주실, 제 고통을 상상하는 일은 의외로 쉬운 거였나봐요. 저는 당신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저를 당신께 겹치면 되는 거니까요. 밀레시안님을 이해하고, 밀레시안님처럼 되기 위해서.
아아, 이건 역시 밀레시안님이 저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셨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걸까요.
저보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해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일까요.
아르후안에서도 결사단에서도 아발론 게이트에서도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제가, 밀레시안님께 저를 가까이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해질 줄은 전혀 몰랐어요.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데 말이에요, 매일매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말이에요. 진작 이렇게 생각할 걸 그랬나봐요. 저를 닮은 밀레시안님의 등 뒤를 보는 것이, 저와 비슷해지고, 저와 같아지면 이렇게 기쁜 거였어요.
사실 밀레시안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도 알아요. 밀레시안님은 자기 몸을 아무리 소중히 여기셔도 누군가를 대신해서 다치실 수밖에 없잖아요. 저를 위해서 그러신다면 슬프겠지만 다시 기쁠 거예요. 그러니 저는 밀레시안님을 위해 다쳐서는 안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알아버렸으니까요, 제가 당신과 같은 곳에 설 수 있는 훌륭한 기사가 되는 날까지.
저의 밀레시안님은 닮은 만큼 고통을 나눠가져주실 테니.
휴가라고 들었을 때엔 깜짝 놀랐어요. 선지자들이 나타난 다음부터 휴가란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았거든요. 유일하게 다행이었던 건 밀레시안님을 만났던 거지만, 그 뒤로 이것저것 힘들기도 했으니까요. 지금은 밀레시안님이 기사단에 점점 가까워지셔서 괜찮지만요.
아벨린 조장님께 몇 번이고 정말 휴가가 맞냐고 묻자 아벨린님은 엄하게 꾸중을 주시려다가 관두셨어요. 휴가를 가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셨나봐요. 그리고 정말 천사 같은 피네 조장님께서 저 대신 딱 하루만 아발론 게이트의 경계를 도와주기 위해 오셨어요. 피네 조장님도 일이 많으실 텐데 말이에요. 밀레시안님만큼은 아니어도요.
잘 쉬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니 쓸데없는 짓을 하면 안 된다고 거듭 주의를 들은 저는 정말 바보 같은 얼굴로 웃었나봐요. 아벨린님이 왠지 한숨을 쉬셨고 피네님이 손을 흔들어주셨어요. 갑작스런 휴가긴 해서 사실 먼저 계획을 잡아둔 것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생각하던 건 있었죠. 아튼 시미니님께 감사를 드려야겠어요. 시도를 해볼 수라도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멀리 가지 않고 아발론 게이트의 입구에서 기다렸어요. 오늘 꼭 오실 것 같았거든요. 보통은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정도 오셨으니까, 닷새 넘게 오시지 않았으니 오늘 오실 확률은 높다고 생각했어요.
다리 위로 경애하는 당신의 모습이 보였을 때, 마치 운명인 것처럼 또 두근거렸어요. 왕성 앞에서 처음 뵈었던 날처럼요. 걸어오시는 밀레시안님께 저는 힘껏 달려갔어요. 아발론 게이트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있는 저를 보고 밀레시안님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이시면서도 환하게 인사해주셨어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날개도 여전한 분이, 그렇게.
진정한 천사가 제게 오시는 것처럼.
제가 휴가라는 것을 듣자 밀레시안님은 잘 됐다며 푹 쉬라고 하셨어요. 그러고 싶기도 했지만, 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은 밀레시안님을 만난 후로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저는 짧은 휴가동안 밀레시안님과 함께 하고 싶다고 부탁드렸어요. 무엇을 함께냐고 물으셨지만 저는 정말로, 그냥 함께 있고 싶었어요. 정작 밀레시안님께서 곤란해하신 건 '무엇을' 부분이었어요. '함께'가 아니라요.
하얀 날개를 지니신 나의 천사님은, 함께하는 것은 기꺼이 좋다고 말씀해주셨던 거예요.
아발론 게이트에서의 일을 모두 마치신 밀레시안님을 따라서 바깥으로 나오자 정찰 캠프 곁의 공기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졌어요. 살짝 우회하는 길을 따라서 벨바스트로 간 다음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밀레시안님 곁에서 저는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밀레시안님은 조심스럽게 제안해주셨죠. 벨바스트부터 이어지는 교역로를 따라 타라까지 가는 여행을 자주 하곤 했다고. 천천히 가면 하루가 조금 넘게 걸리는 여정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물론 좋았어요. 휴가는 복귀하는 데까지 걸리는 생각을 생각하면 사실 이틀 정도밖에 안되었으니까요.
벨바스트의 교역소에서 마차에 뭔지 모를 상품을 가득 싣고 저와 밀레시안님은 배에 탔어요. 카브 항구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아서, 오히려 멀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익숙하게 교역마의 상태를 보고 계시는 밀레시안님 곁에서 교역을 도와주는 임프가 시끄럽게 떠들어서 도저히 제가 무어라 말을 걸 수가 없었어요. 저는 교역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사실 그냥 따라온 거니까요.
알터, 마차가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그 말 한 마디에 생길 리도 없는 서운함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저는 고개를 저으며 얌전히 마차 위에 앉아있었죠. 임프가 없다면 정말로, 둘만의 여행이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요.
소문으로만 듣던 교역품 약탈자가 나타났을 땐 그 임프는 짐 사이로 숨어버렸는지 아주 조용했어요. 저는 밀레시안님께서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모든 약탈자를 쓰러뜨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조금 늦어버렸죠. 그래도 밀레시안님은, 제가 있어서 편하다고 해주셨어요. 혼자 다니는 교역길은 위험하고 외로우시다나봐요. 지금은 제가 곁에 있잖아요, 라고 말하니 밀레시안님이 답하시기 전에 성가신 임프가 튀어나왔어요. 혼자 다닌 적 없지 않느냐고. 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밀레시안님이 어쩐 일로 딱 잘라 말씀하셨어요.
약탈자가 나타나면 언제나 혼자였지.
임프는 대꾸할 말이 없는지 허풍을 떨며 다시 짐 위에 앉았고 당신께선 말고삐를 당겼어요. 카브 항구를 떠나 던바튼을 지나서, 어느 길로 갈까 고민하시는 게 보였죠. 어느 길로 가든 타라는 꽤 멀었으니까요. 오스나사일 산길은 험하니 그다지 가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지만, 역시 산길을 거쳐 이멘 마하로 간 다음 타라로 넘어가는 쪽이 빠르긴 하겠죠. 오스나사일에는 약탈자도 많은 모양이라, 저는 멀리 돌아가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답니다. 하지만 밀레시안님의 생각은 그게 아니셨나봐요.
하룻밤을 쉬어가야한다면 탈틴보다는 이멘 마하쪽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 좋아요!
이멘 마하에는 의외로 자주 갔었지만 제대로 둘러보거나 그곳에서 쉰 적은 별로 없었어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도시 이멘 마하에서 밀레시안님과 하루를 보낼 수 있다니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요.
빽빽거리는 임프를 반쯤 무시한 채 약탈자를 물리치며 오스나사일을 넘어 호수의 도시에 도착하자 마차에서 쌓였던 피로 같은 건 단박에 없어졌어요. 밀레시안님도 이 도시에서 제대로 머무른 적은 없으시다고 하시며 잘 곳을 수소문하자 곧 괜찮은 여관을 알 수 있었어요.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을 아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인사해왔죠. 저는 교역 마차를 지키느라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았어요. 기사단의 규율에 따르기 위해서라도 그러는 게 맞았지만, 사실은 밀레시안님 곁에서 같이 걷고 싶었어요. 오늘의 밀레시안님은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으시다고 보여드리고 싶어도, 밀레시안님께서 저에게 마차를 봐달라고 부탁하셨으니 어쩔 수 없었죠.
내일 떠나기 전에 되찾아가기로 하고 교역소에 마차를 맡긴 뒤 드디어 성가진 임프와 잠시라도 헤어질 수 있었어요. 여관에 들어가 짐을 풀었을 때엔 저는 들떠서 별 생각이 없었어요. 시간이 이대로 흐르지 않았으면, 하고 얼빠진 망상은 해보았죠. 내일 눈을 뜨면 밀레시안님과 여행한다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가장 행복했어요.
아마 밀레시안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았더라면, 제 오늘은 그렇게 망상에 빠진 채로 평범하게 잠들어 끝나버렸을 거예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밀레시안님은 자기가 실수를 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와 여관에 와본 적이 없으니 몇 명이냐는 말에 2명이라고 말하고 부연설명을 하지 않으셨다나봐요. 저는 그 때 다시 깨달았죠, 이분이 밀레시안이셨지 하고.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육체를 지니고 계신다지만, 그건 정신도 그랬던 거예요. 지금은, 여성의 몸을 갖고 계신 제 천사님은 이멘 마하에서 필요한 것을 사가지고 돌아오시면서 그제야 아셨던 거죠.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고요.
그래서 알터만 불편하지 않다면 하루만 같은 방을 써야할 것 같은데…….
저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어쩐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듯하기도 한데, 사실 노숙이야 익숙하니 밀레시안님께 이 방을 드리고 제가 하루만 교역소 옆에서 노숙을 해도 될 일이었어요.
하지만, 오늘의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죠.
누구도 없이, 아발론 게이트도 기사단원들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임프도 없이 밀레시안님과 진정으로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낼 순 없잖아요.
당신께서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육체과 정신을 지니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안도될 수가 없었어요. 자칫하면 혼자 나가서 주무시겠다고 하실 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조금은 망설이는 밀레시안님을 방 안으로 들어오시게 했어요. 깨닫고 보니 2인실이었던 곳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었어요. 당신께서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으시는 동안 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당연하죠, 그게 예의니까요.
눈쌀을 찌푸리는 듯한 기척과 고민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없었다면, 결코 돌아보지 않았을 거예요.
언제 다치신 건가요?!
음…… 어제일까요.
무덤덤하게 대답하시는 밀레시안님의 몸과 다리에는 제가 치료소에서 뵈었던 날보다 상흔이 가득했어요. 미처 다 낫지 않은 듯한 상처도 꽤 있었죠. 당신께서는 태언하게 조금 자면 낫는다고 하셨어요. 밀레시안은 원래 그리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는 종족이지만요.
왜 치료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있어서 그러신 건 아니죠?
아, 붕대를 사는 걸 깜빡했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치료하지도 않은 몸으로 마차를 끌고 약탈자들과 싸우며 울라 대륙의 반 정도를 저와 여행하셨다니 기가 찰 지경이었어요. 어디서 그리 다치신 거냐고 하자 부탁을 받아서 그림자 세계의 아주 깊은 곳에 다녀오셨다고 말해주셨죠. 그래서 며칠 동안 아발론 게이트에 가지 못한 거고, 거기에서 아주 성가신 것들에게 물리고 쏘이고 데이며 고생하셨다고.
제 마음은 모르신 채 밀레시안님은 태연하게 말씀하셨어요.
역시 화상은 잘 안 나아요, 좋은 붕대가 필요하려나.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여쭤보자 밀레시안님께서는 몸을 감싸는 얇은 천만 두르신 채 어떻게? 라고 되물으셨어요. 저는 제 신성력으로 무언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죠. 최근 수련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상대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신성력을 응용해서 몸에 다른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요.
밀레시안님께서는 그럼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저에게 가까이 와도 된다고 손짓하시면서, 두 다리를 끌어안고 웅크리듯 앉으셨죠. 저는 뻗어나온 날개 뒤편에 당신의 등을 보고 앉을 수 있었어요. 데인 것인지 긁힌 것인지 모를 상처자국은 거기까지 남아있었죠.
저는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등에 손을 댔어요. 매끈하고 부드러운 피부 위로 남은 어색한 느낌의 흉터에 손끝이 닿자 숨소리가 그곳을 통해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저는 조용히 집중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고, 밀레시안님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셨죠.
사실 방금 전에는 거짓말을 했어요.
저에겐 그런 능력 같은 건 없거든요. 조장급 기사님들도 지녔을까 말까 할 정도의 응용 능력을, 제가 지니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다정한 밀레시안님께서는 제가 당신의 몸에 손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행복할 줄 알았다면 진작에 부탁드릴걸, 아니면 거짓말을 조금 더 빨리 할 걸 그랬나봐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알터.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신 채 당신께서는 여전히 다정하기만 하셨어요. 아마 이런 상처쯤은 제가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도 낫게 하실 수 있었겠죠. 저에게 기회를 주신 건 역시 제가 부탁드렸기 때문일 테니까.
손끝에서 숨소리를 느낄 때마다 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은 밀레시안님과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보드라운 피부와 기묘하게 거친 상처자국이 동시에 남기는 감각이 짜릿해서 일까요.
알아요, 당신께서 받으시는 모든 고통은 제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받들고 계시겠죠. 이것만 해도 그래요. 그림자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도, 사실 그게 아튼 시미니님의 말씀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저와는 별로 상관이 없거든요.
아튼 시미니님이 저의 신이시라면, 눈앞에 계신 분은 제 천사니까 충분히 상관이 있지만요.
아파요, 알터.
이런, 저도 모르게 신성력을 발현시켰던 모양이에요. 저는 죄송하다고 황급히 사과드린 뒤 밀레시안님의 등을 보았어요. 제가 상처를 터뜨려버린 건지 검붉은 핏방울이 조금씩 흘러떨어져서 날개에 송글송글 맺혔어요.
아름다워.
저는 그 순간 깨닫고 말았답니다.
저와 가장 가까운 밀레시안님, 제 목표, 제 고통의 대리자, 저와 가장 닮은 밀레시안님.
당신의 상처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신께서 수많은 이의 아픔을 짊어지고 계시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지금의 핏방울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당신을 걱정하는 제 고통을 가져가셨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이제 손을 뗄 수가 없었어요. 손에서 신성력을 거두지 못한 채, 무언가에, 아니 당신께 홀린 것처럼 멍하니 있었어요.
저, 낫고 있는 건가요?
아,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버린 것처럼 상처가 생거버렸어요. 있던 것을 터뜨린 게 아니라, 완전한 새 상처가. 아픔은 다난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시던 분은 지금쯤 제 바로 앞에서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계시겠죠. 저를 대신하는, 제가 드린 고통을 안고.
알터?
저는 대답할 수 없었어요. 목이 막힌 것처럼, 아니 입술이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어요. 제가 경애하는 당신의 등에 상처가 하나 더 늘었어요. 제 신성력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말이에요.
밀레시안에게 흉터도 상처도 미래에는 의미가 없어요. 지금은 있더라도 환생하면 사라져버릴 거니까. 그래서 오직 지금에만 의미가 있는 아픔이 당신과 저를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
이건, 기쁜 거구나.
제 몸을 묶어버리고 목소리를 닫아버리고 나를 조종하는 것은 이제야 간신히 정체를 알게 된 환희였어요. 제 고통을 대리하는 당신께 제 스스로 고통을 안겨드리는 것이 당신과 제가 이렇게 빨리 가까워지는 길이었나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머리가 이상해질 것처럼 기쁘기만 하구나.
저도 모르게, 자꾸만 저도 모르게 밀레시안님의 하얀 날개가 조금씩 붉어졌죠. 밀레시안님께서는 이제 아무 말도 없으셨어요. 저는 이제와서는 너무 뻔한 물음을 던졌어요
괜찮으세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기까지 했는데, 고통을 인내하는 잦은 숨소리 사이에서 제 천사님은 힘겨운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살짝 뒤를 돌아보며 대답해주셨죠.
그대가 원한다면, 괜찮겠죠.
식은땀에 절어버린 갈색 머리카락도 몽롱해진 초록빛 눈동자도 드문드문 붉어져버린 하얀 날개도, 제가 아는 밀레시안님이셨어요. 저는 무척 안심했답니다.
두 팔을 조심스럽게 벌려서 뒤에서 당신을 끌어안자 여전히 부드러운 피부와 아직 따스한 상처의 흔적을 모두 제 품에 담을 수 있었어요. 이러자 제가 경애하는 분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저는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당신과 가장 가깝네요. 몸도 아픔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예요. 괜찮다고 해주셨으니, 저는 그 말을 믿을 거예요. 제 천사님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믿겠어요?
밀레시안님이 제 팔을 꽉 붙잡으시네요. 조금 아프지만 그정도는 당신의 아픔에 비교도 되지 않을 테니 저도 괜찮아요. 그정도는 제 숨마저 틀어막을 듯이 잔인하게 강렬했던 기쁨이 희석해줄 거예요. 제 몸에 생기는 생채기보다는 제 천사님의 팔과 다리에 새겨질 흉터가 더 많겠죠. 언젠가 사라진다고 해도 괜찮아요, 다시 만들면, 또 밀레시안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이제야 알았는데 저쪽에 거울이 있었네요.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가까워진 저와 밀레시안님을 비춰주는 거울이요.
거울을 보는 것처럼, 가장 닮은 밀레시안님과 저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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