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1 마지막화 직후의 이야기
"아, 진짜로 죽는 줄 알았네……."
아마도 저쪽의 대장처럼 보였었지. 영문 모를 마법쟁이 같은 게 나타나서 그녀에게 엄청난 위력의 마법을 퍼부었다. 피하지 못했으면 죽든가, 이리니드가 꿈에 나올 정도로 먼 곳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어쨌든 죽지 않았으니 됐다. 다우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상황이 끝난 집결지 근처에 각자 회복하고 있는 부하들과 좀 떨어져서 앉았다. 상황이 엄청나게 복잡하게 돌아갔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외는 별로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 수상한 로브를 입은 놈들의 이상한 계획이 박살나고 은인인 밀레시안이 만족했다면 그걸로 된다.
'발레스에도 이제 별 일 없을 거고.'
힐웬 광산이 그 꼴이 났던 것은 꽤 치가 떨릴 만한 일이었다. 밀레시안을 도와주는 김에 대충 복수한 셈 치면 수지타산이 맞을까. 이리아에서 수상한 짓을 벌이는 자들이 자이언트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해하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발레스에서 나올 일이 없었다. 저 치들도 아마 그랬겠지.
화상을 입은 팔이 조금 덜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우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 익숙하지 않은 상쾌함 같은 것이 몸 주위를 둘러싸는 감각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누군가 힐링 마법을 걸어준 것 같았다.
"그걸 맞고도 죽지 않다니 야만인답게 명줄이 질기군."
"아, 너냐."
전투상황을 들어보니, 유인 작전이 있었던 장소에 나타난 흰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던진 마법은 이리니드가 그들에게 내린 저주만큼이나 강력한 모양이었다. 그 엘프들이 기를 써도 가끔은 생치기 하나 내기 힘든 그 자이언트들이 온갖 화상에 동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꼴인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원드는 없지만 그래도 훌륭한 솜씨로 힐링을 캐스팅한 메이크가 다시 마법을 정확하게 사용했다.
"이거 좋은데? 포션을 마시는 것보다 깔끔해."
"그쪽에겐 없을 마법이니까."
이 뒤는 힐링으로도 회복되지 않을 상처였다. 화기가 가시고 생명력이 어느 정도 돌아와 거동이 편해진 다우라가 움직이려고 하자 메이크가 팔을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앉으라는 손짓이었다.
"음?"
"앉으라고."
"다 나았는데."
"헛소리 하지 말고 앉아라, 죽기 싫으면."
그야 죽기는 싫지."
"당장 죽어나자빠질 것처럼 싸워놓고 말은 잘도 하는군."
앉으란 말을 들은 다우라의 입장에서는 참 놀랍게도, 허리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을 것 같은 메이크가 다가와 몸을 살짝 굽히고 아직 상처 자국이 없어지지 않은 곳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수백 번은 더 해본 것처럼 익숙하고 섬세한 솜씨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자이언트를 치료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엘프에게 치료받는 쪽도 처음이었다. 기분이 머쓱해진 다우라가 대꾸했다.
"이미 죽을 정돈 아니니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닥치고 있어."
"아, 예."
약주고 병주나, 전혀 고운 말은 오가지 않는 두 종족 대표가 있는 곳을 다른 병사들은 실드라도 둘러쳐진 것처럼 멀리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자이언트들이야 대장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별 일 없을 거라고 믿었고, 엘프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온 메이크에 대한 신뢰로 다가가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고 있을 거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계속 하던 신경전의 연장이었다.
"죽을 것 같아서 해준 거야?"
정말로 거의 완벽한 치료가 끝나고 난 뒤 몸이 가뿐해진 다우라는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확실히 치료의 수준은 높았다. 힐링만으로도 어지간한 부분은 다 나아버릴 정도였다.
"자이언트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정말 한 입으로 두 말은 안 하네. 근데 입은 그러시면서 치료는 왜 해준 건데 그럼."
상처의 회복은, 라고 말을 꺼내려던 메이크가 어딘가에 시선을 두었다가 눈을 돌렸다. 스스로도 지금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규약이나 협정에 의해 이루어진 지극히 평등한 공동 전선일 뿐이다. 동료라거나 그런 단어를 붙일 수 없다. 전투 중이라면 설령 상대의 등 뒤를 지켜주었다고 해도 합당한 핑계가 바로 생기지만 응급처치와 힐링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다우라는 죽을 만큼 다쳤긴 했지만 내버려둬도 죽진 않았을 터다.
"아무튼 빠른 치료라는게 좋긴 하네. 후퇴하면서 치료 온천에라도 가면 빨리 나을까 했는데 말이야."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응급치료도 없이 돌아다니니까 그……."
"그?"
메이크는 조금 전에 이어서 실언할 뻔한 입을 닫았다. 그래도 드디어 핑계를 찾아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꺼져도 시원찮을 자이언트의 대장을 굳이 치료해준 아주 적절한 핑계를.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고 죽지만 않으면 적당히 나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겠지."
"하하, 정답이네. 죽지 않으면 낫긴 하거든."
그리고 죽지 않고 싸워서, 고향을 지켰지. 다우라의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메이크도 알고 있었다. 분하고 짜증나면서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말이 있었기에 일시적인 공동 전선이나마 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다만 조금 전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흉터였다.
"그래, 살아있으면 되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입었던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아."
싸움 속에서 누군가 잃어버린 것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꺾이고 긁히고 찔린 부상은 돌고 돌아 아픔을 남기는 것은 때론 영광의 훈장일 수 있어도 때론 통렬한 아픔을 재생시켰다.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의 외침은 아무리 힐링을 걸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메이크의 얼굴에 파인 것처럼 길다란 흉터가 있듯이, 다우라의 얼굴에도 긴 칼자국을 연상시키는 흉터가 있었다. 그게 눈에 들어왔다.
"공동의 적에게 대항해서 싸울 때라도 자제하라는 충고다. 그 무식한 전투방식을 고수하다간 언제 뒈질지 모르는 자이언트 대장."
"무식하다고 해도 몸으로 맞고 버틸 수 있으니까 하는 거라고. 하긴, 연약한 꼬맹이는 그랬다간 진짜로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안 되려나?"
또 도발이 오간 것처럼 되어버리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메이크에게 먼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항복 의사를 표현한 것은 다우라였다.
"됐다 됐어. 계속 이래서 뭐하겠냐. 아무튼 치료해줘서 고마워."
"오늘을 자이언트에게 감사받을 만한 일을 한 내 인생 최대의 수치로 기록해두지."
"아,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대충 알았으니까 됐다고. 보아하니 너도 한두 번 다쳐본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게 싫어하는데 굳이 변덕을 부려서 마법에 붕대에 이것저것 해준 거 보면 약간 이해는 가니까."
자이언트가 살아가면서 입는 물리적 상처의 개수를 세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유난히 크게 자리 잡고, 의미가 남고, 흔적도 새겨져버리는 상처들이 있다. 그건 그런 상황에 처할 만큼 절박했거나, 불의의 사고였거나, 혹은 지금 메이크가 한 것처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기도 했다.
"아픈 건 싫지. 몸에서 불이 나는 것 같고 짜증도 나고 비명도 지르고 싶고. 하지만 한 편으론 그래서 알 수 있잖아. 그렇게 아픈 내가 여기에 살아있지. 그 고통이 보기 흉한 자국이 되어 사라지지 않더라도 볼 때마다 가끔 생각하게 되는 거야. 이것도 내가 살아왔던 증거라고."
"……."
"네가 해준 것처럼 제 때에 좋은 처치를 하고 다 나아서 아프지 않게 되는 것도 좋은 일이야.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 지금 네가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화상이나 동상을 줄줄이 달고 발레스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랬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을 거야."
이 자리에서 밀레시안을 돕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인간, 엘프와 공동 전선을 만들어 최전선에서 싸운 것을 다우라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여전히 의지가 가득한 결연한 눈이었다.
"싸워서 번거로운 일이 있다면 싸워서 얻어낸 것도 있으니까 하는 거지. 그것도 아니면 대장 짓 어떻게 해먹겠어?"
"일관적으로 야만적이군."
"넌 일관적으로 입이 험하고."
다우라는 굳이 상대를 걱정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모든 장소에서 격전이 일어났었고 다른 엘프들처럼 활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검을 사용하는 메이크라면 다쳤을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다. 알아서 치료하고 여기까지 와서 사람 속을 긁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었다.
자이언트와 엘프 사이라서 걱정의 말을 버려둔 것이 아니다. 다우라가 싸움 속에서 얻은 성과를, 살아있다는 실감과 함께 얻어낸 무게를 분명히 메이크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메이크는 당연히 자이언트들만큼 싸움을 좋아하지는 않아도, 이곳에서 싸워야할 의미를 알고 있는 자였기에 여기까지 온 것일 테니까.
각자 부상의 경중은 달라도 제각기 다친 부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두 대장은 일시적으로 어깨에 짊어졌던 생명을 이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무언가와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될 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때까지는 다우라가 누군가를 몸으로 지켜줄 일도 메이크가 비통함을 씹어삼키고 힐링을 사용할 일도 없을 테니.
다우라가 얼굴에 지닌 흉터를 자신의 얼굴 같은 경위로 얻었을지 아닌지 메이크는 몰랐다. 그저 그 흉터에서, 무수한 상처들의 앞에 있었던 어떤 상처에서부터 다른 자이언트들보다 배는 다쳐오고도 멀쩡한 것처럼 버티고 있는 미련함에 할 말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건 메이크가 알고 있는 무게의 아래 서있는 자였다.
싸움과 개죽음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엘프는 감정을 억누른 채 생명을 공유해주었다. 그렇게 증오하는 자이언트에게 온정 따위를 베풀 수 있는 인내심이 있으면 어째서 그 험악한 입은 자제하지 못하는 걸까 하고, 다우라는 내심 웃었다. 저 엘프 대장이 입은 그래도, 다우라와 일치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정신머리가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테니.
각자가 끌어안고 짊어진 것을 묻는다면 많은 것의 가치가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리니드가 두 종족을 사막과 설원에 흩어놓은 이후 끌어안은 무게는 비슷할 것이다.
태어난 곳을, 함께 자라고 살아온 소중한 이들을 등 뒤에 두고서 물러나지 않고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장이 할 일이었다. 그 날의 그들은 무사히 해냈다.
"애들도 회복됐으면 우린 슬슬 돌아갈까 하는데. 그쪽은 어때?"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필리아로 돌아갈 거다. 너희들이 협정을 위반했는지 아닌지는 카스타네아님께서 판단하신 다음에 서한을 보내시겠지."
"별로 위반한 것 같지도 않고 좋게 끝났구만 하여튼 깐깐하네. 뭐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그럼 또 보자고."
정말로 거의 다 나은 다우라가 적당적당한 인사라도 했지만 메이크는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모양이었다. 등을 돌린 메이크가 가버리기 전에 한 마디 했다.
"또 보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봐준 자리에 흉터가 생겨있으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부관을 불러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메이크가 저 멀리 작아져 슬슬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뜻인지 메이크가 해준 말을 곱씹던 다우라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그러니까 지금 치료 한 번 해줬다고 유세떨겠단 거네?"
그 뜻이기도 아니기도 했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하기로 한 다우라는 부하들을 일으켜세우러 등을 돌렸다. 한참이나 간격을 둔 두 종족의 진지가 철수 준비를 마치고 각자 마나터널로 향했다. 대장들끼리 대충 이야기는 끝낸 셈이니 별 대화도 필요 없었다.
누님은 어떻게 그렇게 덜 다쳤냐며 감탄하는 부하 옆에서 다우라는 내가 좀 강하다며 대충 넘기고 사람 죽일 듯이 꽉꽉 매인 붕대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생명을 짊어진 자로서 그들이 공유했던 무게만큼 단단하고 풀리지 않을 듯한 매듭이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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