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하는 이야기
몸을 전부 가리는 로브는 모든 것을 그 안으로 감춰버린다. 어쩐지 그녀에게는 그런 느낌이어서, 톨비쉬가 로브를 입은 순간 톨비쉬라는 인간이 로브 안으로 숨어들어가 탈바꿈한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의 그림자를 톨비쉬에게서 불현듯 느낄 때마다 가졌던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혹이라고 하는 편이 가장 맞았겠지만, 이번의 착각은 정도가 지나쳤다. 그렇기에 톨비쉬가 보았던 무력감을, 그 초록빛 눈동자 안에서 그녀 스스로도 느꼈다.
"톨비쉬가 추측하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맞을지 아닐지 모르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지만.
"……밀레시안인 나를 가장 오래 지켜봐준 사람이었죠."
밀레시안이라는 단어가 투아하 데 다난에게 널리 퍼지기 전부터, 그 아득한 북쪽 땅의 설원 위에서 한 드루이드는 여신의 인도를 받은 밀레시안을 알았다. 그가 그토록 찾았고, 나중에는 그토록 절단하려고 했던 여신이 보내준 이는 그에게 희망이거나 원망의 제물이었을 것이다.
스칼레타는 차라리 이제는 원망만이었기를 바랐다,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드루이드에 대해서 그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으므로, 그녀는 떠나간 이에 대한 기억만을 영원히 끌어안아야 했다.
"사실 스칼레타씨를 지켜보았다고는 해도, 기사단에서도 밀레시안이 어떤 존재인지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전해지는 이야기나 밀레시안들이 해준 말, 그간 해온 관찰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이지요."
"밀레시안 본인들도 모르니까요."
"하하, 선수를 치시는군요. 제가 더 물어볼 수 없지 않습니까."
"톨비쉬가 물어본다면 어느 정도는 얘기해드릴 수 있어요. 아는 것뿐이라도."
"제가 알고 싶은 건 역시 도망치셨던 이유입니다만, 묻지 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톨비쉬가 능글맞은 건지 태연한 건지 모를 말투로 계속해서 말하면, 그녀는 자르거나 말릴 수가 없었다.
"정리하자면 밀레시안 스칼레타씨를 가장 오래 지켜본 그 사람을 제가 떠올리게 했다는 얘기가 되겠죠. 대뜸 '안 닮았다'고 하신 건 평소에도 그런지 아닌지 신경쓰고 계셨다는 거고요."
톨비쉬의 말은 언제나 정확하게 사실을 지적했다. 거의 비어가는 오렌지 주스 잔 앞에서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싶었다.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다기보다는 어색했다.
닮지 않았다고 쭉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 누군가를 잊어버리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닮지 않았는데."
"스칼레타씨, 잠시 괜찮으십니까?"
"네?"
톨비쉬가 한없이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감히 제가 상담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조금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으음, 네."
"닮지 않았다…… 에서 말을 조금만 옮기면, 연상이 된다는 것이겠죠. 스칼레타씨가 연상하고 의식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짐작해보면, 저 자신과 로브인데."
"……."
"사실 닮지는 않다 하시니, 그럼 제 얼굴이나 체형이나 뭐 그런 것에서 연상하여 문제를 발견하셨다고 치고."
"……."
"저는 스칼레타씨와 계속 가깝게 지내고 싶습니다. 로브야 다음부터 입지 않는다고 쳐도, 저에게서 스칼레타씨를 당황하게 한 요소를 치울 수 없다면 같은 일은 또 반복될지도 모르지요."
"애초에 톨비쉬가 그렇게 해줄 일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녀의 마음 속 문제다. 톨비쉬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스칼레타씨쪽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권유하는 것은 너무 건방진가 해서 말입니다."
"내…… 문제."
내가 밀레시안인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그녀는 비통한 울음을 삼키려 할 수밖에 없었다. 톨비쉬는 그 참는 얼굴을 알면서 말을 이었다.
"그냥 당황하신 정도였다면 이렇게 진정되신 다음엔 웃으면서 넘겼겠지요. 제가 아는 스칼레타씨라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봤을지도 모르겠군요."
"……."
"그 어떤 사도와 선지자를 상대로도 물러나지 않던 스칼레타씨의 그런 모습은 저에게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고, 솔직히 말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상황을 초래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거든요."
"톨비쉬의 탓이……."
"아니지만, 계기는 드리지 않았습니까."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말로 답해줄 수도 없다.
당신이 지닌 색이 나를 가끔씩 미치게 한다고 말하려면,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할까. 그 누구도 상처입지 않는 길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길을 걷고 싶어하는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예상 외의 겁쟁이였다.
"스칼레타씨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달라는 말입니다. 음…… 기사단에 급한 일이 있으면 바로는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요."
뼛속까지 신의 기사인 톨비쉬가 다정하게 격려해주려는 것 같았다. 진심이 보였다.
그녀는 진심에 약했다. 선의든 악의든 그 무엇도 아니든 간에.
평소라면 고맙다, 고 말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올려진 로브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누웠다. 긴 머리카락이 탁자 아래로 흘러내렸다. 톨비쉬가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스칼레타씨? 피곤하신가요?"
"……."
로브는 보이지 않는다. 톨비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체향이 옅게 묻은 천이 뺨과 코끝에 스쳤다. 그녀가 입을 열자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나왔다.
"톨비쉬는."
"네."
"당신 자신의 죽음을 조건으로 이룰 수 있는 대단한 일을 누군가가 요구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
톨비쉬는 진짜로 조금은 당황하면서도, 그녀가 입을 열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아무도 들은 적 없는 속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물음이었다. 밀레시안에게 육신의 죽음은 의미가 없으니.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따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뜻이라면?"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는…… 죽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질 조건이 너무 많은 물음이었다. 그래서 톨비쉬는 진심이면서도 적당한 대답을 했고 그녀는 만족한 것 같았다. 조금 부스스해진 얼굴로 일어난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나에게는 그런 신이 없었군요."
신앙은 신실한 기사에게도 어려운 문제였고, 기사단에서도 매번 화두에 오르는 이야기였다. 톨비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셔였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연고 없던 여행자의 신은 바로 세계이니."
"……."
"세계의 일부가 나에게 죽음을 요구한다면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밀레시안의 죽음을 말하시는 겁니까?"
"다시는 에린의 세계를 밟을 수 없이, 지녔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져버리는 이를 나는 본 적이 있어요. 밀레시안의 진정한 죽음이란 그런 것이겠죠."
"그건 다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망각은 죽음과 아주 가까운 사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나의 신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신의 일부가 저에게 죽음을 요구했으니, 충돌할 수밖에 없었죠."
그 누구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 톨비쉬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신앙이라기보다는 존재의식에 가깝다는 것을 금방 파악해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도 일단 존재하지 않고서는 신앙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당신이 입은 로브는 나에게 그런 기억을 불러일으켰어요. 그게 다예요."
죽을 수는 없었지만 그러고 싶기도 했고, 살아가려고 해도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기억이 있다. 그녀가 입에 담지 않은 것을 톨비쉬가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잘 마셨어요."
생긋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에게 톨비쉬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그냥 스칼레타씨의 앞에서 로브를 입지 않는 것만이 정답인 것 같군요."
"이제 로브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차라리 제가 조심해야할 것을 알려주신다면 노력해보겠습니다만…… 무리겠지요."
어디에서 불현듯 솟아올라 그녀의 눈동자에 빛을 앗아갈지 모르는 기억의 파편들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터였다.
"네, 정말로 톨비쉬의 탓은 아니니까요. 다만……."
긴 시간을 살아가는 이에게 긴 기억은 행복보다는 독이 되는가. 그녀는 톨비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닮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않는 쪽이 훨씬 어려운 것을 보니 역시 무리였다.
그렇게 그대를 기억하고.
"제가 로브를 입은 그 사람을 기억에 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죠."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정말 실례였습니다."
"끝까지 들어줘요, 톨비쉬. ……나는 지금 톨비쉬와 있는 시간은 유쾌하다고 느꼈어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톨비쉬가 아니다. 오히려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 사람이 톨비쉬였다.
"그러니 고민하지도 자책하지도, 아까도 말했듯이 사과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비록, 톨비쉬가 입은 로브에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기억을 상기해버렸지만, 그만큼……."
잊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잊을 수 없는 이의 기억을 이제 잊지 않으려고 하는 이에게.
"톨비쉬도 기억할 거예요. 당연하지만, 유쾌하고 따뜻한 사람으로요."
"듣던 중 반가운 얘기로군요. 제 생각보다 스칼레타씨와의 거리가 가까웠나 봅니다."
"그건 톨비쉬가 저와 함께하겠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니까요."
한 때 죽음을 요구했던 세계가 이제는 옆자리에 설 이를 보내주었다고 생각하니 뒤죽박죽이라 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에린은 그녀에게 그런 세계였다. 가혹하기도 절망적이기도 온유하기도 벅차오르기도 하는, 그녀의 신.
"아발론 게이트로 돌아가야겠어요. 슈안과 얘기하던 걸 내팽개치고 나왔거든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에게 톨비쉬가 올 때처럼이 아니라 훨씬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까지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건네진 손에 살짝 손가락을 내려놓은 그녀가 미미하게 웃었다. 벨바스트의 술집에서는 잔을 치우러 온 종업원이 술집에서 주스만 마시고 간 어이없는 손님들의 뒤에 난데없이 남겨져 있는 싸구려 로브를 보고 버려야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톨비쉬는 역시 갑옷이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스칼레타씨는 패션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군요. 매번 뵐 때마다 다른 옷을 차려입고 계시는데, 전부 아름다워서 깜짝 놀랄 지경이니까요."
심각한 일인가 하고 전전긍긍하며 걱정했을 견습 기사 몇몇과 알터가 들으면 맥이 빠졌을 만한 대화를 하면서 두 사람은 아발론 게이트의 문을 밟았다.
알지 못하는 언젠가에 또 당신이 입은 것에 놀라 기절할지 도망칠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녀는 함께 해줄 이가 곁에 마지막까지 있을 미래를 믿어보기로 했다. 설령 그런 날이 이제 없다고 해도 기억 속의 로브에 조금은 따뜻한 기억을 덧씌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르밀레] 꿈과 기억 (0) | 2015.09.21 |
---|---|
[다우메이] 생명의 무게 (0) | 2015.09.18 |
[톨비밀레] 당신이 입은 것에는(중) (0) | 2015.09.10 |
[톨비밀레] 당신이 입은 것에는 (전) (0) | 2015.09.09 |
[톨비밀레] 당신에 대한 예의 (0) | 201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