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밀레시안 스칼레타와 톨비쉬의 이야기.
"누구인가 했네요."
길고 치렁치렁한 로브는 갑옷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추위에서 몸을 보호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목 뒤로 단정히 묶은 머리카락을 내리며 아벨린은 그 사람이 로브의 모자를 벗기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 발레스에서 시달리고 온 탓인지 반대로 더운 숨을 토하며 드러난 얼굴에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기사다운 풍모가 가득했다.
"이거 몰라볼 정도로 인상이 바뀌나?"
"생각보다는요."
"톨비쉬님! 오랜만이에요!"
"아발론 게이트에 오는 건 확실히 그렇구나."
조장으로서 아벨린과 대화하기 위해 온 톨비쉬는 알터가 들어도 모를 만한 이야기를 몇 가지 늘어놓고는, 최근 아발론 게이트의 경계에 도움을 주며 여러 임무를 각자 수행 중인 견습 기사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게이트의 슈안에게 물어보니 견습 기사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은 밀레시안은 며칠에 한 번씩 꼭 찾아오면서 물심양면으로 애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톨비쉬로서는 그 밀레시안에게 견습 기사들을 맡긴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 듣고 보니 휘둘린 것 같다는 선량한 밀레시안이라면 분명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예상대로 그 밀레시안은 견습 기사들에게도 평판이 꽤 좋은 것 같았고, 슈안의 얼굴을 봐도 그 밀레시안은 점점 이 기사단과 아발론 게이트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아벨린에게 슬쩍 물어보니 아벨린도 그 점은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기사가 아닌 사람에게 어디까지 기사단의 일을 알려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분이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젠 정말 한 분의 조장 같으시던걸요."
"알터, 견습 기사들과 우리는 달라."
"죄송합니다……."
"전보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가까워진 건 사실이긴 하지. 기사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적으면서도 협력해주는 점은 매우 감사할 만한 일이고 말이야."
"맞아요. 오늘도 곧 오실 것 같은데."
알터의 말에 따르면 그 밀레시안은 견습 기사들에게 훈련을 시킨 뒤에는 시간을 맞춰서 아발론 게이트에 찾아와 결과를 점검하고 새 임무를 지시한다고 했다. 톨비쉬는 기왕 들렀으니 그 밀레시안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기다리기로 했다. 톨비쉬의 조원들과 합류하는 것은 잠시 뒤 벨바스트에서였다.
슈안이 밝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린 세 기사 중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경계중이 아닌 톨비쉬뿐이었다. 천천히 톨비쉬가 걸어가 인사를 하려고 했을 때, 아마 톨비쉬는 그 초록색 눈에 비친 감정을 읽었다.
당황과 무력감과 공포.
"저, 저기 레타님!! 레타님?!"
슈안이 불렀지만 쏜살같이 뛰어간 밀레시안은 아발론 게이트 바깥쪽으로 향했고 그걸 지켜보던 알터도 뛰어나갈 기세였지만 아벨린이 알터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임무는 여기에 있는 거야."
"저, 그 근데 레타님의 상태가!"
"내가 가보지."
톨비쉬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알터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아벨린에게 한 마디 더 혼이 나고 다시 그 자리에 제대로 섰다. 아벨린도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톨비쉬가 갔으니 괜찮을 거야."
"저기, 그게."
"뭐지."
"톨비쉬님이라 안 괜찮은 건 아닐까하고…… 아까의 레타님, 톨비쉬님을 보고 놀라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요."
"그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다면 더욱 톨비쉬가 해결해야겠지."
"그, 그렇네요. 그럼 톨비쉬님과 레타님이 같이 돌아오시길 기다릴게요."
속이야 어떻든 겉은 기사답게 돌아온 알터의 곁에서 아벨린은 사실 알터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던, 위대한 그 밀레시안이다. 시체가 살아 움직여도, 기르가쉬나 제바흐가 나타나도 덤덤하고 묵묵하게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알터나 피네에게 상냥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밀레시안을 아벨린은 조금은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 강인함은 반신이 될 정도로 많은 역경을 헤쳐나온 덕분인가, 했었지만.
사실 아벨린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톨비쉬를 보고 당황한게 맞더라도, 왜 도망치듯 뛰어가버렸는지 그 이유까지는 아벨린에게 남의 일이었다.
'그 위대한 밀레시안에게도 의외의 약점이랄 건 있는지도.'
알터가 들으면 울상을 지을 만한 생각을 하며 아벨린은 늘 그랫듯이 경계에 집중했다.
아발론 게이트와 벨바스트의 경계인 보랏빛 숲까지 가버린 밀레시안을 찾는 데에는 톨비쉬에게도 약간 시간이 걸렸다.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어렵지는 않았다.
"저, 스칼레타씨?"
그것은 톨비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한 때 톨비쉬가 카즈윈과 다리 위에서 싸웠던 그 근처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던 밀레시안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 또 뛰어가려다가, 돌비쉬에게 저지당했다. 정확히는 톨비쉬가 그냥 앞에 서 있었을 뿐인데도 그대로 멈춰서 더 움직이지 않았다.
"스칼레타씨, 제가 모르는 사이에 스칼레타씨에게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면 사과를……."
하고 싶으니 이유를 들려달라고 하기 전에, 그녀는 고운 옷이 망가질 듯이 격렬하게 도리질을 쳤다.
"사과도 됐고 미안하다고 하지도 말아요! 톨비쉬 때문이 아니니까!"
"저, 그럼."
"이유도 묻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 그럼 스칼레타씨도 지금 당장 저 아래 해변가까지 달려갈 것처럼 그러고 계시면 대화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스칼레타씨의 상태가 이상해보인다고 알터가 걱정하고 있던데."
그 말에 조금 진정했는지 그녀는 맥이 풀린 것처럼 아, 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알터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돼죠."
효과가 있다. 톨비쉬는 이 밀레시안은 휘둘린 정도로 끝나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녀는 일단 진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톨비쉬와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스칼레타씨?"
"톨비쉬, 부탁이 있는데요."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그 로브 좀 벗어주세요."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 톨비쉬가 잠시 황당해해도 될 만한 부탁이었지만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톨비쉬는 흰 로브를 벗어 접은 뒤 팔에 걸쳤다. 알반 엘베드를 상징하는 익숙한 갑옷이 나타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톨비쉬과 마주쳤다. 톨비쉬가 웃어보였다.
"로브가 문제였습니까? 진작에 말씀해주셨으면 벗었을 텐데요."
"으…… 저, 그게, 그러니까."
로브보단 톨비쉬가, 그리고 톨비쉬보단 그녀의 과거가 문제였다. 이런 걸로 톨비쉬를 곤란하게 했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에게 톨비쉬가 손을 내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얘기나 조금 더 할까요?"
"톨비쉬는…… 바쁘지 않아요?"
"바쁘긴 해도 숙녀를 에스코트할 시간 정도는 있답니다."
그녀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을 잡은 톨비쉬가 벨바스트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날개에서 깃털을 팔랑팔랑 떨어뜨리며 그녀는 질질 끌려갔다. 정찰 캠프를 지날 때엔 갑옷이 너무 눈에 띈다며 다시 로브를 쓴 톨비쉬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는 그녀를 보며 톨비쉬가 말했다.
"정찰 캠프를 지나면 로브는 버리는 게 낫겠군요."
"그, 그러지 않아도 돼요!"
"스칼레타씨가 불편해하시는데 그정도는 괜찮습니다."
결국 로브를 버리느냐 마느냐로 옥신각신하며 걷다보니 그렇게 손목을 잡힌 채, 기사가 술을 권할 수는 없어도 차가운 주스 정도는 사드릴 수 있다며 톨비쉬와 스칼레타는 벨바스트 주점에 도착해있었다. 엘베드의 조장이 주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면 조원들 대신 아벨린이 잔소리를 퍼부을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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