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냥, 때때로 떠오르는 긴 기억에 몸을 맡기면 데자뷰가 짙어질 뿐이었다. 그게, 이 금발의 기사만 아니었어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안부 얘기라도 해볼까요? 피곤하신 것 같기도 하고."
그 밀레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 수백 마리쯤 쓰러뜨린다고 해도 피곤할 몸이 아니었다. 신의 힘으로도 수복되지 않는 구멍 같은 것이 손바닥 안에 들어오지 않고 도망치고 도망쳐서 때때로 떠오른다.
당신을 닮은 사람이 있었어, 갑옷도 걸치지 않았고 체격이 강인하지도 않았고 안경을 꼈었지. 사실 닮은 건 따져봤자 그냥 그 머리카락 정도가 아닐까. 당신처럼 웃어주지도 않고 받쳐주지도 않고 곁에 있어주지도 않은 사람을 그저 조금 닮았다고 겹쳐보는 것이, 당신에게 크나큰 실례라는 것을 알지만.
"톨비쉬."
"그렇게 진지하신 걸 보니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기사 체면에 어긋난다고 아벨린한테 혼나진 않았는데."
아니에요, 용건을 말해주세요. 그렇게 말하자 갑옷을 두른 금발의 기사가 온화하게 웃으며 내용은 그다지 온화하지 않은 용건을 전달했다.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가 덧붙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죠?"
없어요. 뭔가 있는 건 내 마음 속 일이지.
몸에 갑옷을 두르고 그 기사를 따라 이멘 마하 뒷골목을 벗어나며, 막연하게가 아니라 확실하게 떠올려본다. 처음 들었던 말들이 흘러내려오고.
당신은 모든 것을 주어도 돌아갈 곳이 있잖아.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힘으로 도와주십시오.
도와달라는 말을 들어버리면, 이제는.
"뭐가 묻은 건 제가 아니라 밀레시안씨였나보네요."
머리카락에 묻은 솜털을 떼어주며 금발의 기사가 웃었다. 일순간 멍해진 그 밀레시안은, 기억 속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새로 떠오른 것은 아주 다른 말이었다.
마지막까지 제가…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해준 사람이 눈앞에 있다.
"저는 규율상 안되지만, 역시 피곤하신거면 광장에서 차가운 거라도 드시는 편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