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기까지 하고도 안 끝나는지 모르겠는
밀레시안 스칼레타와 톨비쉬의 이야기
로브가, 그게 말이지. 도저히 말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냥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런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톨비쉬랑 머리색마저 똑같아서 잠깐 당황했지 뭐예요.
그 말이 그렇게나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꼴사납게 아발론 게이트에서 도망치듯 뛰어나온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나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거나 좋다고 연발한 끝에 눈앞의 탁자 위에 도착한 것은 차가운 오렌지 주스 두 잔이었다. 톨비쉬가 양손으로 잔을 점원에게서 받아 하나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일단 드세요, 뛰고 난 다음이니 목도 마르실 텐데."
그정도 뛰었다고 숨가빠할 체력은 아니었지만 대꾸할 말이 없어 그녀는 조용히 빨대만 집어들었다. 쪼르륵, 하고 몇 모금 단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고 나니 약간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문제의 로브는 아마 톨비쉬의 무릎쯤에 걸쳐져 있을 터였다. 그래서 보이지 않았고 마음이 편하다.
겨우 그정도로 편해질 거면서, 무슨 유난인지.
"정말로 진정되신 것 같네요. 여기 주스가 맛있어서 그런가."
"저기, 미안해요 톨비쉬. 괜한 데에 신경쓰게 해서."
까치발을 뜨듯이 눈동자를 그녀가 살짝 올리자 금발의 기사는 차분하게 미소지었다.
"사과하지도 미안하다고도 하지 말라 하시더니, 오히려 스칼레타씨가 그러시네요."
프릴이 팔랑거리는 귀여운 드레스를 입은 갈색 머리칼의 소녀는 빨대와 주스와 톨비쉬를 번갈아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임무를 함께 수행할 때에는 단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 톨비쉬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러니까 톨비쉬가 가장 많이 보았던 그녀는 상냥하고 친절한 소녀에 가까웠다. 더 자세하게는 섬세한 일, 특히 요리와 가사 전반에 능숙했다. 공작이나 제작에 있어서도 가게를 차려도 될 만큼 익숙하다고 견습 기사들에게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톨비쉬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전투 방면에서도, 박아넣은 화살은 제바흐를 멈추게 할 정도로 굳건하고 인형의 내달림은 시체들을 무덤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 만큼 강인했다. 다재다능한 밀레시안, 알터가 존경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해낸 밀레시안 스칼레타는 지닌 재능을 바탕으로 어디에서도 동요하지 않으며 먼저 손을 내미는 데에 주저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라고 불리는 자의 동요를 옆에서 보는 것은 알반 기사단원으로서도, 개인으로서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사실 저는 스칼레타씨가 이렇게 당황하신 건 처음 봐서 굉장히 신경쓰입니다."
"당황……."
"아니라고는 못하시겠죠. 알터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또다시 알터를 핑계로 써먹자 시무룩해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당황했어요. 사도가 아발론 게이트에 나타나는 것보다 당황스러웠을 것 같네요."
"로브를 벗어달라 하신 걸 보니 로브를 입은 저를 보고 놀라셨다는 말인데. 그럼 스칼레타씨를 놀라게 한 건 저니까 제가 사과를 드리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톨비쉬가 허점을 찔러들어갔지만 제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다시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지 말아주세요. 그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이유도 묻지 말아달라 하셨었죠."
"그래요."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요."
그냥 당황한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이어질 얘기가 아니었다. 그녀도 그냥 톨비쉬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불편했다 했을 것이고, 톨비쉬도 가볍게 납득하고 넘어갔을 그런 얘기가 아니게 된 것은 두 사람 다 분명히 느꼈던 탓이었다.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마저 일순간 정지하게 만들었던 무력감과 공포심을.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스칼레타씨가 좋습니다."
"……."
"그래서 무척 신경 쓰이네요. 스칼레타씨는 잊어버리셨을지도 모르지만, 저희 기사단의 특급 주시대상이셔서 말이에요."
"나를…… 주시하는 건가요, 톨비쉬."
다난에게서 주목받는 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반신의 힘을 얻은 이후로는 겉모습을 바꾸든 나이를 바꾸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 세계 자체에서 떠나버리지 않는 이상,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은 그녀에게 허용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톨비쉬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이제와서 스칼레타씨를 주시해서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방금 그 말을 한 건, 정말로 잊고 계셨던 것 같지만 저는 스칼레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에 대해서 훨씬 많이 알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
"왜 로브를 벗어달라하셨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알 것 같아졌습니다. 다만 이유를 묻지 말아달라 하셨으니 저도 입에 담지는 않겠습니다."
"……."
그녀는 길게 침묵을 지켰다. 톨비쉬가 이만큼 말하니 그녀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톨비쉬는 그녀의 행적에 대해서 세세한 부분까지는 몰라도,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 떄 여신을 구하기 위해 떠났던 드루이드는 이 세계에 여신을 향하는 것이 아닌 다른 길을 열고 세상을 떠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드루이드는 그녀에게 무엇을 남겼길래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을 이토록 가라앉게 만드는가.
기사단원으로서도 개인으로서도 톨비쉬는 꼭 알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지금 넌지시라도 물었다가는, 그 어떤 전투에서도 도망치지 않는 그녀가 정말로 도망쳐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톨비쉬."
"네, 스칼레타씨."
"로브를 보여주시겠어요?"
그 말에 톨비쉬가 버리지 않고 있던 로브를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반쯤 마신 주스 잔 너머로 긴 천이 살포시 누워있는 광경을 눈동자에 담았다. 그리고 톨비쉬와 로브를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역시 안 닮았어요."
"말씀하시는 게 제가 추측하는 인물이 맞다면, 정말로 안 닮았는지 의심스럽군요."
"어째서요?"
"닮지 않았다면 굳이 저를 보고 도망치시지 않아도 됐을테니까요. 내심 상처 받았다고요?"
톨비쉬가 익살스럽게 말하자 그녀가 진짜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 큰 남자가 한껏 귀엽게 상처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니 그녀에게도 꽤 먹혀든 농담이었나 보았다.
생각보다 꽤 길게 웃고 나서 그녀는 떨어진 날개 깃털을 옷에서 털어내고 허심탄회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조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과 당신을 정말로 닮았다고 하면, 톨비쉬에게 큰 실례인걸요."
정통 드루이드와 신실한 신의 기사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부터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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