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하는 밀레시안의 모티브는 첼군(http://duelists.tistory.com/7). 번번이 첼을 빌려주시는 시연님 감사합니다.
전부 다 네 탓이야.
이것도 저것도, 내가 이러는 것도.
그렇게 말하면서 문득 깨어났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도 잠깐 백일몽을 꾼 것 같았다. 그 밀레시안은 짜증스런 얼굴로 몬스터의 시체 곁에서 스태프를 등에 매었다. 이젠 무거울 리가 없는 던전의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 던전에 왜 들어왔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포워르와 다툴 이유가 없어진 지금 던전에 갑작스레 들어와있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변이었다. 어느 던전인지도 모르겠다.
'백일몽에 몽유병이라도 겹쳤나.'
잠깐 정처없이 걷던 밀레시안은 벽의 모양과 발 아래에 채이는 뼛조각을 보고 이곳이 라비 던전임을 기억해냈다. 잊기 힘든 곳이었다. 해골더미를 조각내고 미믹을 발로 걷어차며 가다보면 미혹의 노랫소리와 마주치는 곳이다.
라라… 라라…….
이젠 환청도 들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는 자신이 던전의 마지막 방 앞에 도달해있다는 것을 알았다. 짧은 던전도 아니건만 꿈을 꾸면서도 잘도 온 모양이었다.
오는 도중에 죽어버렸다면 그런 꿈 같은 건 꿀 틈도 없었겠지. 이 던전의 몬스터 정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것이 오히려 화근인 느낌이 들었다. 좀 죽었다가 살아나다보면, 그러다 보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라라… 라라… 돌아올 때는 그 칼을 던져버려요. 당신께 다가갈 때 그 칼에 비치는 내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답니다.
문 너머로 노래가 들린다. 그는 이제 칼을 들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를 만났던 때에는 평범하게 검을 든 채 험하게 눈이 쌓인 언덕을 건넜던 것 같기도 했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하시는군요, 첼씨.
라라… 라라… 그대가 내 침실에 처음 들어온 날에 사실 전 놀라지 않았답니다. 제 가슴 속에는 이미 당신의 사랑이 살고 있었거든요.
매섭도록 포근한 눈보라가 감싼 봉인된 언덕에서 낙원의 꿈을 흘려보내는 자에게 안온한 침실은 없었다. 이웨카가 뜰 때쯤, 언제나 눈과 흙이 묻은 발로 그의 보금자리 언저리를 밟으면 동화 속 마법이 풀린 듯한 사내가 초연한 얼굴로 그곳에 서있었다. 그것이 사랑으로 풀린 마법은 결코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조금은 나았을까.
라라… 라라… 눈을 감지 마세요. 그 눈빛 속에 나를 가두어주세요.
간밤엔 그의 꿈을 꾸었다. 눈을 감았던 것이 후회될 정도로 기분이 비참해졌는데도, 어떠한 꿈이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끄집어내서 바닥에 팽개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해서 토할 것 같았다. 갇힌 것은 그인지 나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갇혔다면 그것은 그의 끔찍하도록 절실한 언령 탓일 것이고 그가 가둬졌다면 그것은 죽어도 죽지 못하기에 떼어낼 수 없는 미련 탓일 터였다.
당신은 나의 주인님 당신은 나의 주인님 검은 장미의 영원한 주인.
검은 장미에서 흐르는 피도 붉기는 하구나. 발 아래에 엉망으로 짓밟힌 서큐버스의 시체는 검은 옷도 검은 부츠도 불길한 색으로 적셨다. 그 밀레시안은 그제야 꿈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고, 그 수많은 생에서 해본 적 없던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 때 내가 죽어버리겠다고 약속했다면 너는 멈췄을까, 타르라크?
그랬더라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감정 없는 붉은 눈동자 아래로 입꼬리만 올라간 조소가 여신상 아래에서 빛났다. 연장되는 백일몽에 지친 몸을 기대고 앉아 질척거리는 손을 멋대로 뻗었다.
꿈에서의 내 손도 저 검붉은 장미처럼 되었던가. 그 손으로 당신을 만졌다. 처음 만났던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꿈은 마지막으로 만났던 당신을 재생시키고 재생시켰다. 그는 밀레시안을 죽이고 또 죽였다.
꿈이어도 죽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피로 흠뻑 물든 밀레시안은 마침내 그 옷자락의 끝을 잡았다. 새하얀 것은 금방 때가 타게 마련이다. 끝부터 물들어간 백색의 로브가 어느새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 몸의 피로 물들인 것이라면 내가 다시 새하얗게 해줄 텐데, 그럴 수가 없어. 그건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늘어난 것들이야. 당신이 선택한 것도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도 모두 합쳐서, 끝까지 전진하기 전에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던전의 벽처럼 우리를, 아니 나를 그런 꿈에 옭아매었어.
너는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냐.
눈동자로 뜨뜻한 것이 흘러내렸다. 물론 그가 흘린 피가 아니었다. 언제 이마에 튀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체액이었다. 그 밀레시안은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백일몽은 조금은 흐릿해져 있었고 이제는 꿈도 현실도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한 결론도 내릴 수 있겠지.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조형물에 지나지 않는 여신상 아래에서, 첼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지나온 길에 모든 것이 이미 죽어있다고 해도 쥐새끼 한 마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말이 있었다.
타르라크, 당신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렇게 가버리지 않았다면 말이야.
당신이 나에게 버리라고 권하던 것들 가장 앞에는, 눈 덮인 숲속 언덕 안쪽의 아무도 모를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