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TRPG 룰 <인세인>의 시나리오 【Room -0-】와 【Room -0- 어나더 Cube】의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대량 포함되어 있으니 열람하실 때에는 주의 부탁드립니다.
그때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었느냐 묻는다면 나는 조금 더 사는 것이라 답하는 대신 그 사람에게 아무일 없게 해달라 빌었을 터였다.
그 사람이 괜찮을 수 없다면, 그만큼 나를 소중히 여겨주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내가 없이 그 사람이 괜찮다면 그것 또한 한편으로는…….
……하얀 방에 선 내게는 그런 기억이 잠들어 있었다.
실험용 안드로이드, 개체 번호는 아무래도 좋겠지. 눈을 뜬 순간부터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한 행동뿐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을 위해서 무엇을 흉내내야 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 제조된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이 판단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목적 및 용도 사형수의 인도적 사형 집행 안드로이드, 나의 원형이 되는 기억의 뿌리는 눈앞에 있는 상대의 죽은 연인.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공적인 기억회로 속에서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부른다.
"으…… 카즈윈이야?"
"그래."
"머리가 아파서 아무 생각이 안 드네… 카즈윈이구나."
안드로이드에게도 머리가 아프다는 개념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갓 기동하여 목적을 확인하고 복잡한 작동 절차를 마친다. 문제는 아직 없다. 나는 자신다운 말을 입에 담는다.
"카즈윈이랑 어제 같이 있었나…?"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아마도는. 하긴 나도 잘 모르겠네……."
"피네."
"응?"
그렇다, 그는 나를 피네라고 부른다.
나는 피네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피네.
그의 마지막이 될 누군가이자 누군가가 아니다.
<나의 소망은 하얀 방만큼이나 깨끗하여>
"그럼 몇 개월이나 될까요."
"……."
"괜찮으니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일 년은 넘지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피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게의 점원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인사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미소였다. 방금 전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았다.
그 미소는 결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살아가는 시간의 양보다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결심. 피네는 진료실을 나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네, 네, 소장님. 네, 그 부분 역시 그렇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요. 후회라뇨, 이건 제 꿈이 되기도 하는 걸요. 그럼 두 시간 뒤에 연구소로 갈게요."
아무리 우수한 연구원이라도 자기 자신의 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자 공학 관련 최첨단 연구소에서 일하는 피네는 각종 첨단 전자 공학의 전문가였지만,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은 이미 전신에 침투하여 전신을 갈아치우지 않는 이상 고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직까지 피네가 일하는 연구소에서도 인간에서 안드로이드로의 뇌 이전이 완벽하게 성공한 적은 없었다. 결국 인간의 뇌와 안드로이드의 뇌는 똑같을 수 없었다. 원본 뇌에서 기억을 복사하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그 경우 원본이 죽고 남은 안드로이드가 정말로 본인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남았다.
설령 그러한 문제가 있더라도,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관련된 과학을 연구하는 인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꿈이었다. 안드로이드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최신형 전자 뇌에 인간의 기억을 트레이스하는 것이 훨씬 간편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은 이미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그러한 연구 결과를 얻어낸 것은 병이 커지기 시작할 즈음, 카즈윈과 다른 연구실로 배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만 그 누가 첫 실험체로서 자기 자신의 기억을 제공할 것인가, 가 문제였다. 또 하나의 내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개체를 만들어내는 실험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카즈윈의 팀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안드로이드의 뇌에 천천히 지식과 기술을 주입하는 방향이 연구소에서는 더 주류로 취급 받고 있었다. 피네도 그 점에 딱히 큰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라고 할까, 자신의 생명이 채 일 년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결심했다.
안드로이드의 뇌에 인간의 기억을 트레이스하는 실험이 성공한다면, 어떠한 기억을 전자 뇌에 전달해야 효과적인 활동이 가능한지 알아낼 수 있는 비약적인 실험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돕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를 만든다는 꿈은 한층 더 가까워지게 된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내'가 둘 있을지도 모르는 것쯤 무엇이 문제일까.
아니면, 내가 '나' 대신 살아줄 것을 원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실험이 성공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까.
소장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가도 피네의 굳은 결심을 말리지는 않았다. 두 시간 뒤 피네는 자신을 실험체로 제공하는 동의서에 사인을 마쳤다. 피네가 소속된 팀에서는 차곡차곡 준비를 마치고 피네의 기억을 트레이스할 전자 뇌와 그 전자 뇌에 이어진 몸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동하게 될 뇌가 자신의 몸을 어색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실제의 피네의 몸을 측정하여 1mm의 오차도 없을 만큼 유사하게 만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