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망 소재 주의
"아무리 소비해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무한하고, 무한하다는 것은 곧……."
"없는 것과도 같을지도 모르니, 값을 매길 수 없는가."
묘비에 새겨진 이름은 그에게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말이었다.
남자는 글자를 심장 위에 써내려갔다. 피네, 문구는 간결했다. 의무를 내려놓은 자가 이곳에 잠들다. 가슴 속에 남은 이를 닮은 하얀 꽃잎이 묘비 옆에 떨어져있었다. 그는 꽃다발을 가져온 적이 없었다.
"숨어있지 말고 나오는 게 어때."
들켰다는 것도 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리라. 긴 시간을 살아온 자답지 않게 쭈뼛거리는 발걸음으로 나타난 밀레시안은 이멘 마하의 꽃 파는 소녀에게서 사왔을 하얀 꽃다발을 등뒤로 어설프게 감춘 채 고개를 들었다.
"……카즈윈."
"나를 피하는 이유는 알아.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흐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편이 양쪽 모두에게 편하기 때문이었다. 편하게 말을 주고 받을 만한 상태는 전혀 아니었으므로.
"피네라면 꽃을 싫어하진 않을 거야."
"……."
밀레시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카즈윈의 곁을 스쳐지나가 묘비 앞에 하얗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두었다. 묘지에 가져오는 것이라기에는 제법 장식이 화려했다. 아마 조문에 쓰인다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카즈윈은 추측하고 말았다.
아마 긴 세월을 살아온 밀레시안도 자기가 죽인 사람의 묘비에 찾아갈 일은 한 번도 없었을 테니.
꽃을 내려놓은 밀레시안은 카즈윈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더 멀어지지도 않았다. 카즈윈이 느끼기에 밀레시안은 할 말이 있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건 카즈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그랬냐고 묻지 않는 이유를, 너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
"……그래서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카즈윈."
차라리 자신에게 매몰차게 굴어주는 편이 낫다고, 밀레시안은 생각하던 것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먼 예전에 한 번 보았던 듯한 얼굴로 밀레시안을 응시하며 심장에 박힌 글자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은 걸까, 아니다. 원망하더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다. 밀레시안이 아는 카즈윈은 그런 사람이었다.
"카즈윈."
"기다렸어."
언제든 그에게 와서 밀레시안은 말하지 않을까 싶었다. 밀레시안이 손을 뻗어서 이 땅 아래 잠들게 한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살아남은 자가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를.
그게 죽은 이의 묘비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이것 또한 신의 인도인가.
"피네는 그 목을 내게 주었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카즈윈은 눈을 감았다. 원인도 계기도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는 담백하고 치명적이게 눈앞에 자리했다. 생명을 빼앗은 것은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 내어준 것은 발 아래에 잠든 이…… 카즈윈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밀레시안이 그녀의 생명을 손에 쥐어 흩뜨리고 장례식을 멀리 돌아 이곳까지 오며 마음에 담아둔 말이 카즈윈에게 들렸다.
"나는 용서받지 못하는 게 익숙해요. 나는…… 에린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단 하나뿐인 것에게 내려지는 기대, 책임, 요구, 바람, 그리고 이제 카즈윈에게도 그 밀레시안은 하나뿐인 무언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나를 매도해도 용서하지 않아도 경멸해도 상관 없어요."
하지만 카즈윈은 결코 밀레시안을 그렇게 보지 않으리라고 알기에, 오히려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니라, 상처를 끌어안은 이들만이 존재했다.
밀레시안은 살해자가 아니라, 사랑하던 이의 마지막 말을 들어준 하나뿐인 사람이었다.
"……라고 줄곧 카즈윈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내가 뭐라고 할지, 예상했나?"
"아니요. 하지만 카즈윈이 나를 비난하는 쪽이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요."
카즈윈은 예상하고 있었고 예상할 만큼 차분했으며 그만큼 슬퍼하고 있었다. 시야를 차단한 채 손을 뻗은 묘비가 차가웠다.
너는 이 아래에 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성전의 의무를 다한 채, 조금이라도 고통스럽지 않게 잠들어야 했던 네가.
카즈윈은 눈을 떴다. 할 말을 마친 밀레시안은 이제 똑바로 카즈윈을 보고 있었다.
"영원의 목숨을 끌어안은 자가 짐을 내려놓을 일은 없겠지."
"……."
"그렇게 생각하면, 그래.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눈을 뜨고 숨을 쉬는 동안 성전이 막을 내리고 이 세계가 절대자께서 인도하신 낙원이 되는 것을 우리는 결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저 언젠가는 가능하리라 믿은 채 이 몸을 내걸어 나아가는 믿음 덕택에 우리는 기사가 되었다, 삶을 가장 격렬한 투쟁으로 만들면서.
죽음을 축복이라 할 수는 없어도 너에게 안식이 찾아왔다면, 나는.
"물어봐도 될까."
"네, 얼마든지."
"피네는…… 어땠어?"
그 이름을 부를 때 카즈윈의 말이 묘하게 느려졌다는 점은 밀레시안이라도 알 수 있었다. 생명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빼앗았던 밀레시안은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하는 기억의 실타래를 폈다.
조금이라도 더 사는 것보다, 저는 이렇게 하고 싶어요. 무리한 부탁인 거 알아요, 면목도 없고…… 하지만 아시잖아요, 이 상황에서 저는 짐이에요, 그리고 이 전황 속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저를.
"괜찮다고 했어요.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린 결정이라고. 그러니 부탁을 꼭 들어달라고."
"너에게 미안하다고 했겠지."
"피네니까요."
살아서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죽어서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게 죽을 자리를 정한 기사의 소원이었다. 카즈윈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눈꺼풀 위에 그녀를 떠올렸다.
스스로의 무덤을 정한 기사는 또다시 아름답게 웃고 있었을까. 어느 날 보았던 울부짖음이 아니었다면, 그에게도 족하다.
"피네가 괜찮다고 했으면 나도 상관 없어.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할 일이 아닐까."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서 고마워. 같은 자리에 카즈윈이 있었다면 카즈윈이 들었을지도 모를 부탁이었다. 카즈윈은 이렇게 말하는 쪽이 그 하나뿐인 밀레시안이 받을 부담을 늘린다는 것을 알기에 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카즈윈이 꼭 들어야하는 건 그 다음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
복잡한 심경을 얼굴에 여전히 담은 밀레시안이 주저하지는 않고 말했다.
"사실 피네도 좀 더, 더…… 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내게 속삭였어요. 아쉬운 게 없을 리가…… 그랬을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피네는 정했어."
"……그랬죠, 그래서 내가 그녀를 죽였어요. 그 누구의 손에도 죽지 않도록, 내가. 아무도 그 생명에 두 번 다시 손댈 수 없게 전부 재로 만들어버렸어요."
묘비 아래의 관은 텅 비어있다. 세상에 그녀가 존재했다는 증거 중 가장 큰 것을 전부 없애버렸다. 그게 피네가 스스로의 생명을 태워서 마지막으로 이룬 일이었다.
"그렇다면…… 된 거야."
"……카즈윈."
"세계를 위해 피네의 생명을 쓴 값은 네가 먼저 떠맡았어. 나는, 거기서 나누어받겠어."
그 자리에 있었든 없었든 카즈윈이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그녀가 목숨으로 세상에 남기고 흔적의 값어치만큼 무게가 늘었을 뿐이었다.
아래가 텅 비었을 묘비의 위를 채우는 것은 잠든 이를 떠올리게 하는 흰 꽃다발이었다. 카즈윈의 시선이 그 위에 머물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밀레시안."
"카즈윈이 나를 그렇게 부르니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죽지 않는 네 생명에는 값이 있을까?"
죽지도 아프지도 않는 삶은 행복한가요?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 밀레시안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리 소비해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무한하고, 무한하다는 것은 곧……."
"없는 것과도 같을지도 모르니, 값을 매길 수 없는가."
"피네가 내게 부탁한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지도요."
그렇기에 나는 피네의 부탁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답니다. 어쩌면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돌아와서 다른 기사단원이나 카즈윈 당신에게 떠맡기는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에린에 하나뿐인 존재가 떠맡은 무게가 조금 늘어난다고 해서 겉보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나지 않는 법이니까요.
어쩌면 피네가 카즈윈처럼 이런 걸 전부 느끼고 내게 부탁한 걸지도 몰라요. 그런 거라면 나도, 조금은 피네의 영악한 부탁을 원망해도 될 것 같네요.
생명의 값어치를 잴 수 없는 자는 카즈윈보다 묘비를 먼저 떠났다. 카즈윈이 처음 도착했을 때 숨어있었으니, 카즈윈에게 그녀와 둘만 있을 시간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전히 하얀 꽃잎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카즈윈은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네 결정을 존중했겠지, 그러지 않을 수는 없었을 내가 상상으로 원망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그녀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 떨어지는, 더는 구제할 수 없는 길이었다면, 카즈윈에게는 그런 문제였다.
허나 가장 찬란하게 스스로의 가치를 빛낼 순간을 정했더라도, 아쉬운 일은 있을 터였고 그 결정을 존중할 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카즈윈, 다음에는 말이야.
언제인가 약속했던 목소리는 이제 그 다음이 없다. 카즈윈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일어나 돌아섰다. 그녀처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또는 그 밀레시안에게 말한 것을 지키려면 여기에 자주 오지는 못할 터였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의 묘비에 넣을 말을 새기게 된다면 그녀의 묘비에 적힌 것과 비슷한 말을 적을까. 죽은 이는 최선을 다했고 의무는 남겨진 자들이 이어받는다.
그녀는 아쉬워하고 있을까, 그와 함께 낙원을 보지 못한 것을.
적어도 카즈윈이 그녀처럼 잠들게 된다면, 그가 생명의 값을 전부 써버릴 때까지 가장 아쉬웠던 일은 삶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녔던 누군가를 잃어버린 일이라고 스스로를 이 땅에 묻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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